빈 들판에서 시를 생각하다 -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 김상욱(춘천교대 교수) 대중문화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가수가 좋아하는 가수, 영화감독이 좋아하는 감독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문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인이 좋아하는 시인, 소설가가 좋아하는 소설가가 역시 따로 있다. 얼마 전 시인 문태준은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총 16회 추천을 받아 ‘가장 좋은 시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가 지난 해 9월에 발표한 ‘가재미’라는 시 또한 개별 작품 가운데 최다 추천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의 시에는 과연 어떤 매력이 숨어 있길래 시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그의 시에 마음을 빼앗기는 걸까. 자칫 텅 빈 들녘처럼 마음이 공허해지기 쉬운 늦가을, 시 한 편을 벗 삼아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문학의 힘을 느껴보자.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의 거울, 시 시는 ‘말’이다. 마음속에 가득 차오르고 부글부글 끓어올라 마침내 터져 나오는 말이다. 옛날 옛적 어느 이발사가 참다 참다 대나무밭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놓았던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병이 되는 말이다. 이 말이 세상에 내뱉어지는 순간, 시인은 오랜 가슴앓이에서 놓여난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 시인의 자기 해방만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토해낸 말은 화살이 되어 세상에 꽂힌다. 말은 떨리는 화살처럼 세상의 심장부에 박혀 모두를 전율케 하고 세상의 환부에 고여 있던 피를 솟구치게 만든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오랜 속담처럼 말은 시인의 자기 해방을 넘어 세상을 향한 진실한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단, 절박한 말이 전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공놀이가 축구가 아닌 것처럼, 축구에는 그 나름의 규칙이 필요하듯이, 시에도 규칙이 필요하다. 물론 그 규칙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말이 시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란 ‘오직 한 번만 토해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다. 자기 해방도, 세계에 대한 개진도 그 무엇도 시가 아니다. 동산 위에 떠오른 초승달을 보고 ‘초승달’이라고 하는 것은 시가 아니며, ‘눈썹 같은 달’도 시가 아니다. 이미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꽂힌 칼자루’라고 했을 때 시가 되는 것이다. 시의 규칙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랑을 전할 때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의 빛깔과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해’라는 말로 자신의 사랑을 털어놓는 순간 이미 그 말은 마음속을 쿵쾅거리며 내닫던, 그 절박하고도 간절하고 뜨거운 심정을 오롯이 전달하지 못한다. dsj성을 높인다고 감정 또한 그에 비례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너무나 숱한 다른 이들의 사랑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질감과 양감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터질 듯한 내 사랑’이 아니다. 하여 시는 언제나 말의 경계에 놓여있다. 시는 이 말도 아니고 저 말도 아닌 말의 경계에서 상투적인 한 마디 말로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그늘, 마음의 사이를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보는 새로운 거울 하나를 갖게 된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향한 깊은 시선 김천 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波浪)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累代)의 가계(家系)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 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문태준, <가재미>, ‘현대시학’ 2004년 9월호 이 시는 2004년 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 가운데 동료 시인과 평론가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시’로 선정한 작품이다. 오래도록 시를 만지작거렸던 이들이 가려 뽑은 것이기에 믿어도 좋을 법하리라. 이 ‘합리적’ 권위에 기대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생각해보는 일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하다. 먼저 제목을 보자. 맞춤법 표기상 ‘가자미’가 맞을까, ‘가재미’가 맞을까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가자미’이다. 하지만 ‘가재미’여도 상관은 없다. 아니, 오히여 ‘가자미’라고 입을 봉긋하게 모아서 하는 발음보다 옆으로 조금 벌릴 듯 말 듯한 입 모양에서 나오는 ‘가재미’ 발음이 이 시의 이미지로는 훨씬 적합하다. 그리고 더욱 눈여겨야 할 것은 ‘가자미’가 심해(深海)의 바닥에 납작하게 몸을 대고 살아가는 물고기이며, 눈이 한쪽으로 몰려있다는 점이다. 이 두 이미지, 다시 말해 납작해진 몸과 몰려 있는 두 눈은 바닷물의 압력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세계에 둘러싸여 그 압력에 짓눌리는 한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면 ‘가재미’야말로 이 시에 더할 나위 없이 딱 들어맞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첫째 행은 시의 배경과 대상을 표현한다. ‘김천 의료원 6인실 302호’는 배경,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은 시적 상황, ‘(그렇게 누워 있는)그녀’가 시의 대상이다. 김천은 소백산맥 자락에 놓인 조그만 산골 마을과 농사짓는 마을들을 주변에 거느린 경상북도 소도시이다. 그 의료원은 아마 농사짓는 이들이 갈 수 있는 가장 큰 병원이리라. 암 투병 중인데도 작은 소도시 의료원, 그것도 6인실 병실에 ‘누워 있다’는 것은 ‘그녀’의 초라한 처지를 암시한다. 그녀는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자,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힘겨운 생애를 더듬어온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행을 읽자마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바로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행만을 가지고는 답을 알 수가 없다. 그저 시인의 아내이거나 어머니, 또는 아주 가까운 친지가 아닐까 하는 정도로 추측해 볼 따름이다. 다음으로 둘째 행에서 시인은 ‘그녀’가 가재미처럼 누워 있다고 표현하여, 상황을 한층 구체화하여 묘사하고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이란 묘사는 ‘가재미’라는 단어에서 환기하려는 이미지가 앞서 제목에서 추측한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녀’는 일어나 앉지도 못한 채 그저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다. 병실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시인은 이제 침대 곁에 앉아, 가재미처럼 누운 그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등걸처럼 마른 그녀의 손이라도 가만히 부여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가재미처럼 ‘바닥’으로 내려와 ‘그녀’와 마주 눕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키 높이를 가지런히 맞춤으로써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은 동일성을 획득한다. 병색이 완연한 그녀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자기 앞으로 나란히 몸을 내민 시적 화자를 보고 ‘운다’. 그녀의 눈은 온통 화자를 향한 채 몰린다. 가재미 눈처럼. 여섯째 행에서 그녀의 몰린 눈은 화자의 삶을 마주 대하고는 거꾸로 자신의 죽음을 향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마주한 화자의 눈은 그녀 생전의 삶으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은 한 인간의 생애를 가운데 두고 오직 한 곳으로만 모아진 두 눈처럼 한쪽으로만 생각이 치닫는 것이다. 화자의 모아진 두 눈은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반추(反芻)한다. 이제 ‘가재미’의 비유는 단순히 납작하게 누워서 한쪽으로 쏠린 두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형태의 유사성을 넘어 삶 전체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그녀’ 자체가 가재미가 되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의 깊은 바닥을 헤엄쳐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은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으로 형상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이즈음에서 가재미의 몸짓에 대한 표현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가재미는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움직이지, 좌우로 흔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인이 ‘위아래’라고 표현할 수 없었던 까닭은 ‘위아래’라는 말이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지니기 때문이리라. 그녀의 삶 어디에도 솟구쳐 오르는 상승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좌우로’라는 말로 그 방향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한편 여덟째에서 열한째에 이르는 시행들은 그녀의 삶의 굴곡을 표현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호젓한 오솔길에서의 꿈, 꿈꾸며 홀로 걷던 길에서 배경처럼 들려오던 대낮 뻐꾸기 소리의 고즈넉함, 동경과 외로움이 기거하던 조촐한 생활, 점차 가중되는 생활의 무게로 ‘두 다리’는 ‘가랑이지고’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가장 척박했던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그 세월 동안 원래 유선형이던 가재미의 몸뚱이는 수압을 견디지 못해 납작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가재미처럼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밀어내다가 마침내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것이다. 열두째 행에 이르면 화자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느릅나무 껍질처럼 거칠’어진 그녀의 숨소리 때문이다. 죽음을 예감케 하는 마르고 거친 숨결이 산소마스크 속에서 헐떡이고 있다. 화자는 다시금 마지막 모습이라도 붙잡아 두려는 양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지금 온통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의 눈은 오로지 한 방향만 볼 수 있으며, 나는 삶보다 죽음에 한결 가까이 다가선 그녀를 그저 바라볼 따름이다. 그녀가 다시 바다의 심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遊泳)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화자는 분명 알고 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는 것뿐이다.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 것뿐이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가재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또한 그녀가 그러했듯이 막중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온 그녀는 ‘죽음 바깥의 세상’d 남겨진 그를 위해 ‘마른’ ‘몸 위에’ 물을 ‘가만히 적셔준다’. 그녀의 삶 전체가, 그녀가 내뿜는 거친 숨결이 도리어 그를 적시고, 삶을 다독거리고, 따스하게 손을 맞잡아 그가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도와주는 것이다. 삶이 죽음에 기대어 가만히 물속을 헤엄쳐가도록 떠미는 것이다. 말과 마음 사이에 오롯이 새겨진 삶의 무늬 문태준(1970~ )의 <가재미>는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고통이 없다. 아니, 격렬한 고통은 시의 내면 깊숙이 잠복해 있다. 삶의 날카로움이 시적 사유로 둥글게 둥글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다. 이 부드러운 출렁거림은 죽음과 삶의 바닥을 짚어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유장함이다. 의당 이 느낌은 시인의 성찰(省察)에 힘입고 있는 한편, 한 행 한 행 평이하게 서술된 시의 리듬과도 맞닿아 있다. 그런가 하면 비교적 길게 이어지는 산문투의 문장, 긴 호흡과 담담한 어조로 피력(披瀝)하는 삶의 진실은 죽음의 고통을 한결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즉물적(卽物的) 존재를 넘어 죽음과 삶 그 자체를 더욱 깊이 응시(凝視)하게 만든다. 죽음과 삶 사이에 가로놓인 이음새를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럴진대 이 시의 ‘그녀’는 시인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 두 대상과는 마음의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고향(김천시 봉산면 태화리)에서 같이 살다가 지난해에 돌아가신 큰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말기 암으로 고향집에서 투병 중이던 큰어머니를 병문안한 뒤 그녀와 함께했던 삶의 기억을 따뜻한 언어로 하나하나 건져 올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녀’, 곧 큰어머니야말로 성찰과 고통을 동시에 가능케 한 존재일 수 있다. 큰어머니는 육친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즉물성이나, 지인(知人)의 죽음이 지닌 객관성에서 모두 한 발짝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스펙트럼 한켠에 흐릿하게 떠다니던 정서를 똑바로 자리매김해준다. 말과 말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새로운 성찰을 그에 걸맞은 새로운 언어로 뚜렷하게 돋을새김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 그의 말 덕분에 우리는 고통과 연민,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마음 한 자락을 오롯이 새겨둘 수 있다. 시를 사랑하라, 그러면 네 삶과 영혼이 풍요로울지니 가을은 어제나 결실가소멸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거느리고 다닌다. 그래서 언뜻 가을의 빈 들판은 결실과 수확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실한 수확이 거쳐 간 들판일수록 더욱 허허롭게 마련이다. 오롯한 삶일수록 죽음이 더욱 애틋한 것과 마찬가지다. 저물어가는 이 가을, 차분히 시라도 한 편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괜스레 상념만 늘어가는 이 계절에 마음을 가득 채우는 삶의 허무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시에 기대어볼 일이다. 그러면 시는 어김없이 우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삶이란 그저 허무한 것만은 아니라고 나직이 말을 건넬 것이다. 그리고 dfl가 이미 건너온 ‘성근’ 과거의 기억을 이어주며, 앞으로 건너게 될 세월의 강을 앞질러 예감케 해 주리라. 시가 있으므로 우리의 추억은 더욱 비옥해지며, 희망 또한 선명해지지 않던가. 시인 안도현(1961~ )이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하여>에서 한 다음 말이, 새삼 마음속에 긴 여운을 남긴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에 비하여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 불행하다. 시 읽기가 새롭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경험이라면,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의 경험은 얕아서 찰방거리고 추억은 남루할 테니까 말이다. 추억이란 세월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고교 독서평설’ 11월호에서 옮김 |
'詩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와 형상 , 둥근 언어의 집 / 강희안 (0) | 2009.01.04 |
---|---|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 펀글 (0) | 2009.01.03 |
詩作을 위한 열 가지 방법 / 김철진 (0) | 2008.12.28 |
다시 서정시를 옹호하며 / 김지혜 (0) | 2008.12.25 |
내가 시를 쓸 때는 / 정대구 (0) | 2008.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