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구/ 내가 시를 쓸 때는
내가 생각한 것, 내가 쓰고자 하는 것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얼기설기 얼켜서 자리잡을 수 없는 것, 가슴이 미어질 듯 뿌듯한 혼돈의 세계를 어떻게 풀어 쉽게 표현해 내나?
거짓되지 않게, 본래의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 숨쉬는 율동을 붙일 수 있을까? 시를 쓸 때마다 항상 내가 부딪치는 기본적인 두 개의 질문이다. 그러나 대번에 쉽게 쓰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우선 가슴 속에서 곱삭여 녹익힌 뒤에 붓을 들지만 처음에 내보인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
시가 어려울수록 나의 본래의 심상과는 다른 설익은 시로만 생각되어 몇 번이고 고쳐 써서 시를 쉽게 만들도록 고심한다.
지금우리는 첨예한 시대, 첨예한 사회, 첨예한 논리에 얽매여 있다. 첨단과학화, 첨단화된 사회에서 나의 의식세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복잡한 회로처럼 어렵게 얽혀있다. 그러니까 현대시는 어려운 것이 정상일고 하지만 시는 논리를 뛰어 넘는 곳에 있다 정서의 다단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렵게 살게 하는 논리로 묶어 놓는다. 뿐만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을 문명인의 삶으로 여기고 뻐기고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이 기계를 낳고 문명을 낳고 논리를 낳는 것이지 사람이 논리의 지배, 기계의 지배, 문명의 지배하에 놓이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데서야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우리는 어서 이 논리의 미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논리의 기계에서 우리 시인이 담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인간 본연의 정서회복, 단순화로의 지향…… 우선 이런 것들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서양적인 물질문명이 낳은 현대의 위기는 동양적인 정신주의로 치유․극복․구제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물질적 부정․부패․부조리․불신․불안․분열․불협화․불법․비리․비겁․소아병적 비소․자만․소멸․파멸들이 자산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누구나 없이 현대인의 삶의 양식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참으로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각자 심각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누구보다 먼저 시인은 분열․파괴․말초적 감각․난삽한 관념․논리․불안한 감정 노출 등을 극복하고 정신적 관용․관대․겸양․화합․평화․화친․친구․친밀․생성․성장․자유․진리․양심․사랑․통일․아름다운 심성을 개발하여 마비된 현대인을 치유․개혁하는 향방으로 자신의 의식세계를 끝없이 점검하고 새롭게 혁신시켜야 한다. 나부터 먼저.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획일주의․도식화․경색화․자기모방을 엄격하게 배제하고 지양하여 시의 다양화․활성화․생명화를 우리는 꿈꾸어야 한다. 내가 원고지 한 장을 앞에 놓고 갖는 마음가짐은 이렇게 어렵다.
아침밥상을 받았다
아무것도 내가 생산한 것은 없다
쌀 한 톨, 배추 한 포기
소반, 수저, 그릇들은 물론
내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새삼 어쩔 것이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내가 손수 지은 것이 아니고
내가 입고 있는 몇 가지 옷들
그리고 양말 한 짝, 손수건 한 장
내가 만든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종이 한 장, 볼펜 한 자루
내가 직접 만들어 쓸 재주가 없고
집안에서 끄는 물신이나
외출용 단화나 랜드로바도 물론
모두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버스나 전철 혹은 택시가 아니면
나는 출퇴근도 어렵다
남의 힘을 빌지 않고는
따뜻한 잠도 잘 수 없고
물 한 모금 마시기 어렵다
(며칠째 수돗물이 얼어붙어
지금 세수도 못하고 있음)
그렇다면 시로서 나는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일용할 모든 것
수천 수만 가지 받기만 하고
실질적으로 하나도 주지 못하는
부끄러운 나의 하루하루
밥숟가락 뜰 때마다 겨우
황송함을 먹을 뿐이네
어떻게 감히 시를 어렵게 써서
남을 골탕 먹이고 큰소리 치고
시건방지게 굴까 내가
그렇게는 못해 못해
(나의 하루하루 : 미발표작)
내 누님을 생각하면
나는 맥주나 마셔 가며
어려운 시를 쓸 수가 없다
과수댁이 된 누님
삼양동 막바지에서 주렁주렁
7남매 매달고 살아온 길은
말도 아니고 길도 아니다
지금은 개봉동 너머쪽
서울이 외면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산 221번지에서,
어려운 시를 쓰고 았는 나를
원망하고 있는 우리 누님
날아간 지붕을 고치고
있는 우리 누님
(나는 여기서 막걸리 마시고 별을 보며 시를 썼음)
그러나 이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어렵게 사는 누님을 생각하면
정말 나는 시를
쉽게만 쓸 수도 없다
(철산리에 가서 : 제1시집에서)
돌이켜 보건대 인간은 윤택하고 편리하게 살기 위하여 과학문명을 낳았다. 첨단화된 기계를 낳고 수많은 이론과 체계를 세웠고 철학과 종교를 심화시켜 왔다. 그러나 어떤가. 궁극적으로 지금 인류는 행복한가.
어리석게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고 자신들이 세운 이론과 체계에 얽매이고 자신들의 그 잘난 철학과 종교로 하여 대립과 갈등 분열을 자초하고 있지 않은가. 무시무시한 핵공포, 가공할 생화학전, 나날이 심각하게 목을조여오는 도시의 각종 공해, 인간성의 상실…… 인간은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적어도 한쪽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이와같은 나의 견해는 잘목된 것일까. 삐딱한 시각일까. 나의 염려는 지나친 소심증의 기우일까.
문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친가지로 파악된다. 지금 문학(시)은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허울 좋은 독창성을 가장한 편협한 자의식의 세계, 글자놀음의 마술 아니면 전통의 미명 아래 낡은 도식의 답습 이런 악재들이 시를 위기로 몰아 넣고 있다.
문학(시)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 삶의 진실한 추구, 아름다운 인간성의 회복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대시는 근본(인간)을 떠나 있다. 뿌리를 망각하고 있다. 인간성의 회복은커녕 인간성의 상실, 인간성정의 파멸, 삶의 부재로 추락하고 있다. 문학은 시대의 반영일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 나가야 한다. 이 현대병(문명병)을 그대로 방치해서 인간의 종말을 지켜만 볼 것인가.
다양성과 복잡성은 다르다. 터질 듯이 복잡한 현상일수록 이를 단순화하는 다양한 방법을 보색하여 매듭을 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반합의 원리로 통합된 전이적 자유, 통일, 균형을 갖춘 인간성을 되찾아야 한다. 시류와 너무 동떨어진 엉뚱하고 소박한 옹고집일지 모르지만 그리고 바위에 계란을 치는 무모한 행동일지 모르지만 나는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의도적으로 이런 생각들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1990. 8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