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시를 읽는 데는 즐거움이 있다. 만약에 그러한 즐거움이 없다면 읽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시인은 시를 쓰는데 고통이 따르지만 그 결과물에 대한 창작의 기쁨이 있다. 시는 우선 말의 재미를 통하여 즐거움을 준다. 이러한 시는 낙서에 의해서 출발한다는 말이 있다.
낙서는 재치 있는 말의 조립으로 시도 그러한 면이 있다. 틀린 점이 있다면 그것은 훨씬 복잡하고 세련된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언어의 축제라고 한다. 말들이 딱딱한 이상에서 벗어나 즐겁게 축제를 벌이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느낌을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풀리지 않는 수하문제를 풀어주는 것 같은 쾌감을 준다.
말은 모양과 소리와 리듬을 가지고 있다. 말의 축제는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서 즐거움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가장 비중이 약한 것은 말의 모양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시에서는 말의 모양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모양이외의 요소들인 소리와 의미의 리듬이 서로 합쳐서 즐거움을 만들고, 가장 중요한 시의 즐거움은 역시 리듬이 된다.
하지만 형태주의 시에서는 활자를 특이하게 배열하여 시각상의 즐거움을 주려고 해서 말의 모양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은 일상 언어와 시적 언어를 구분하고 시적 언어란 일상 언어의 일탈(devi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법을 의도적으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의미공간을 만들어 내는 언어사용법이 시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시를 언어의 등가물(等價物)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시에서 표현한 시적 의미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체험은 등가관계라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이 동일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면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읽는 즐거움이 커진다는 것이다.
시는 이런 만남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서를 내보이지 않고 미지한 상태가 되기 쉽다. 하지만 한편의 시는 그런 간격을 줄여주고 즐거움을 주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깊이 있는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시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왜곡되어 있는 점들이 시를 통하여서 재조명되고 확인될 때 생기를 주고 아픔을 치유해 준다. 그렇게 보면 시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발견하게 되어서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토해내는 역할을 한다.
시는 기존의 언어적 방법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세상의 표현대상은 무한하지만 언어는 유한하고 불안전하다. 따라서 유한한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비유가 필요하고 시의 세계는 이러한 비유가 필요하게 된다. 시는 이러한 비유를 가장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 된다. 참신하고 새로운 비유는 언제나 일상적인 언어사용의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표현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시인 것이다. 기존의 방법으로 나타낼 수가 없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는데서 얻는 즐거움은 곧 신선한 비유가 주는 즐거움이다.
좋은 시는 독자의 상상력이 같이 참여할 공간을 많이 가진 시이다. 시의 의미는 시와 독자의 상상력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의 의미는 시인혼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과거의 문학연구에서는 독자의 의견이 거의 무시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독자의 상상력이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독자의 시 읽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하게 되고 아이들의 낱말 맞추기 혹은 숨은 그림 찾기를 놀이와 비슷한 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생략된 부부를 밝혀내고 숨은 뜻을 알아내려는 노력 속에서 시가 독자와 같이 완성된다. 따라서 시는 미완성 단계로 두어서 그것을 독자가 상상력에 의해서 추정하도록 하는 것이 더 묘미를 갖게 된다. 독자들은 그래서 시를 읽으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시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시인은 그림을 보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길게 그림의 감상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제한된 언어로 그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야 독자가 생각할 공간이 생긴다. 독자의 체험과 상상력이 참여함에 따라서 희미하게 가졌던 시적 의미의 색깔이 분명한 원색으로 드러나게 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적당한 창조의 기쁨을 주게 된다.
좋은 시를 제대로 읽는 다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이 시의 의미완성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인 것이다. 독자가 시를 읽는 즐거움은 말의 즐거움이 있고, 자기 느낌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막연한 것을 구체화시켜주는 효과가 있고, 절묘한 표현의 즐거움과 자신의 상상력이 시의 의미완성에 참여하는 즐거움이 있다.
시에는 순수 아름다움의 즐거움이 있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이 있다. 이러한 나눔은 일관성 있는 분류가 아니어서 서로 겹친 듯한 부분이 있고 빠진 듯한 부분이 있거나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시를 읽는 몇 번의 반복성이 겹쳐서 독자를 매료시키게 된다. 이처럼 시는 읽는 즐거움을 주게 되는데 그 즐거움은 천박한 것이 아니라 깊은 강물의 흐름과 같이 원숙한 감정의 흐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릴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시라는 샘물을 퍼 마실 수 있는 자에게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한편의 시를 읽는 독자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하는 것은 언어 표현의 불확실성이지만 그것이 시라는 장르가 가지는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언어의 불확실성을 역으로 이용하여서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언어조립방법이 시이기 때문이다. 시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의미의 애매성은 시에 있어서 당연시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어떤 시인은 영감을 받아서 신들린 것처럼 시를 쓴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인은 거의 가정법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인은 언어의 마술가가 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에 사용된 언어는 때묻은 말을 죽이고 새롭게 탄생한 말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고 일월이나 새들의 비상처럼 하나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시는 사물의 진실을 언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 자체가 사물이 되어버린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보통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을 시인들은 자세히 관찰한다. 과학자의 눈도 마찬가지다. 관찰은 과학적 발견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거의 같은 이유로 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과학자도 잘 보아야 하지만 시인도 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시인을 ‘관찰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인은 보통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미경이나 망원경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시인은 다수가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서 보여주는 일을 하고, 가슴에 숨어 있는 진실과 외로움을 노출시켜서 딱딱하게 굳어 가는 이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일을 한다. 시인의 눈은 삶의 진실을 볼 수도 있고, 어리석음과 거짓의 뒤에 소외되어 있는 사물들과 지혜를 불수가 있다. 정밀하게 보고 엑스레이처럼 투시력이 강하게 사물을 보게 되어서 한편의 시가 창조되고 그것을 독자는 상상력에 의해서 읽고 공감하며 상호상관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