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무명시인에게 보내는 편지2 / 강은교

문근영 2008. 12. 21. 16:10

무명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
― 이미지와 소리의 교환적 고찰

강은교


그 여자는 문을 연다. 어둠의 넓적한 등을 더듬더듬 만지며 그 여자는 마루 위로 올라선다. 그 여자를 감지한 ‘그림자 스위치’가 작동한다. 현관이 갑자기 밝아진다. 아, ‘그림자 스위치’, 어디 있는지 모르게 벽에 붙어 있다가, 소리 없이 벽에 앉아 있다가 스르르 소리도 없이 켜지는, 안 켜지려고 해도 켜져 버리는 ‘그림자 스위치’. 그러다 그 여자가 마루 위로 올라서자, 감지할 어둠 덩어리를 잃고 소리도 없이 꺼져 버린다. 다시 어둠. 그 여자는 단단한 어둠의 등을 만지며 거기 잠시 선다.
그 여자의 귀에는 어둠을 뚫고 무수한 소리가 들리고 있다. 소리들은 그 어둠 밑으로 잠행하고 있다. 어둠인 그 여자의 혈관 밑으로. 마치 얼음장 밑으로 살살 물이 흐르듯, 모든 물길의 원천은 빙하의 얼음장 밑에 있듯……. 전차가 달리는 소리, 가재가 엎드려 있는 소리, 플라타너스 그늘이 희게 흔들리는 소리. 트럭이 달리는 소리, 우체국 문이 열리는 소리, 언덕길로 올라가던 연애. 소리들은 잠행하고 있다. 소리들은 잠행하다가 서서히 이미지와 꿰매진다.

▪ 아직 소리의 홀몸만으로 잠행하는 것:
① 그 전차는 소리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리고 있다.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이미지 하나가 그 전차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으려 하고 있다가 앉지 못한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다. 전차의 소리는 그 여자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달리고 있다.
② 그 소리 위로 플라타너스 가지의 그늘이 희게 춤춘다.
③ 트럭이 지나간다. 트럭 가득 탄 남자들이 핏물이 튀긴 깃발을 흔들며 뭐라고 소리 지른다.
④ 트럭에 앉은 한 작은 여자 아이가 그 털털거림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시골 풍경을 바라본다. 뒤에 따라오고 있는 또 하나의 트럭에 가득 타고 앉아 있는 이국 병사들. 그들은 뭐라고 떠들며 그 무엇인가를 휘익 집어 던진다. 초콜릿이다. 초콜릿은 희미한 하늘 속에서 갈색으로 반짝인다.
⑤ 그 여자는 또 끊임없이 재봉질을 하는 여자들의 하품하는 둥근 입 속을 바라본다. 거기가 어디일까, 하품하는 여자들은 빠른 손길로 재봉틀의 바늘 밑에 아직 덜 된 재킷을 밀어 넣는다.  
 
한 정거장 갔다. 전차의 문이 열린다. 소용돌이 속에서 막 소리와 꿰매지려고 하는 이미지 하나가 일어선다. 그러나 아직 소리와 꿰매지지 못한 이미지 하나는 소용돌이를 밀고 전차 밖 어둠 속으로 내린다. 그 여자도 따라 내린다. 그 이미지를 따라간다. 그 이미지가 들어서는 어떤 문 안으로 들어간다. 트럭과 초콜릿도 덜덜거림소리판을 내려와 문 안으로 들어간다. 재봉질을 하는 손톱의 이미지의 몸도 재봉틀소리판을 내려와 문 속으로 들어간다. 이미지들은 잠행하기 시작한다.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이 떨어뜨리는 이미지들의 껍질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다.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이 떨어뜨린 이미지들의 껍질만을 손에 들었다. 그 이미지들은  마치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처럼 길고 긴 다리로 어떤 문을 열고 또 들어선다.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의 문을 열고 또 문 속의 문으로 들어간다. 또 문 속의 문으로. 또 문 속의 문으로.
 
⑥ 그 문소리가 자꾸 들린다. 어떤 우체국이다. 그 여자는 어떤 남자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도시락에 빨간 산딸기를 모아든 어떤 남자와. 빨간 산딸기의 얼굴이 묻어 닫기는 소리와 합쳐진다. 이미지는 소리와 꿰매진다. 그 이미지는 또 문과 꿰매진다. 그 이미지는 서서히 색깔과 소리와 공간이 있는 이미지의 몸으로 완성되어 간다.
 ⑦ 그 언덕길의 소리―밑소리도 들린다. 그 언덕길의 소리―밑소리는 플라타너스 그늘이 흔들리는 흰 부스럭임으로 자꾸 커진다. 어둠 속에서 자꾸 커진다. 아, 그 언덕길 플라타너스 흰 그늘. 그 그늘 끝에 서 있던 진한 붉은 색 장미 꽃다발.
⑧ 흰 그늘 밑으로 가득 늘어선 사람들. 고무신을 신고 발뒤꿈치를 가득 치켜들고 있는 그 여자. 휘익 지나가는 자동차, 마치 초콜릿처럼 공중 속으로 사라지는 자동차의 뒷모습. 고개 숙이고 울고 있는 군중들.
플라타너스 흰 그늘이 그 여자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그 그늘을 밟고 그 그늘의 궤도 속으로 그 여자는 들어간다. 그늘의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커다란 흰 그늘의 색깔과 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거기서 더 크게 되어 일어선다. 이미지의 몸이 되어 일어선다. 소리는 서서히 이미지가 된다.

▪ 아직 이미지의 홀몸만이 잠행하는 것:
① 그 전차는 소리와 별개의 이미지가 되어 어둠 속으로 달리고 있다.
② 그 트럭은, 그 피묻은 트럭은 깃발의 이미지가 되어 그 여자의 어둠 밑으로 펄럭인다. 그 초콜릿의 갈색은 어둠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③ 그 재봉질을 하는 여자들을 보라. 이미지의 홀몸으로 실밥을 날리는 걸 보라.

▪ 유난히 마른 이미지의 돌발적 끼어듦:
④ 그 우체국은 빨간 난로가 타는 공간이 되어 불의 색깔과 연애의 따뜻한 열 빛깔을 띠고, 산딸기 빛깔도 띠고 그 여자가 그때 매었던 스카프의 비둘기 빛깔이 되어 일어선다. 소리는 이미지가 된다. 빛깔이 소리의 몸이 된다. 이미지의 입은 소리의 입과 합치된다. 이미지의 머리카락은 소리의 머리카락과 한 몸이 된다.

▪ 소리와 한 몸이 된 이미지의 잠행:
① 그 미로 같은 골목들이 보인다. 그 미로 같은 골목에 냄새를 풍기며 서 있는 이끼 낀 시멘트의 작은 벽들. 작은 문들. 그 작은 문이 열리며 아주 연약한 꼬마가 달려 나온다.
“여기 있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 외치면서 뛰어나온다.  
드디어 모든 문들이 제대로 된 맛과 빛깔과 소리를 내며 열린다. 닫힌다.
그 여자의 앞에 지금 있는 어둠의 등이 알맞은 빛깔과 넓이와 소리를 가지고 그 여자에게 쓰다듬기운다. 그 여자는 장대한 어둠의 몸을 만진다.

▪ 소리와 한 몸이 된 이미지의 돌발적 끼어듦:
② 그 어둠 속으로 느닷없이 가재 한 마리가 달려온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할 듯이 수족관 속에 포개져 엎어져 있던 가재이다. 그 가재가 수족관을 떠나, 그 여자가 서 있는 어둠 속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달려온다.
두 가닥의 긴 수염이 그 여자의 앞에 있는 공간에 출렁인다. 두 가닥의 그 긴 수염, 안테나이다. 소리를 잡아채려는 안테나. 이미지를 몸에 걸치려는 안테나. 소리와 이미지를 한데 재봉틀질 하는 안테나.
그 늙수그레한 남자는 가재를 잡수시라고 말했다. 아주 힘없이. 그러나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 가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신선한 바다의 이미지를. 물의 이미지를 빙하의 이미지를 모든 소리를 그 껍질 밑으로 흐르게 하는 그 잠행의 이미지를. 그 신선함의 이미지를.
이미지들은 어둠의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③ 그 여자는 어둠의 등을 쓰다듬으며 베란다로 간다. 창문을 연다. 어두운 하늘에는 은빛 초생달이 빛을 흘리며 서 있다. 초생달은 아주 걸터앉기 좋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그 여자는 누구인가 거기 걸터앉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다 보니 그 달의 의자에는 무수한 혼들이 걸터앉아 있다. 혹은 앉아 있고, 혹은 매달려 있고, 혹은 매달린 허리를 붙들고 매달려 있고, 소용돌이이다. 회반죽이다. 그렇구나. 혼은 이미지구나. 소리를 꿰맨 이미지구나. 그러고 보니 이곳의 천정들도 그렇다. 이미지와 소리를 한데 꿰맨 혼들이 가득하다. 어떤 때는 칼바람 소리로 어떤 때는 은빛 바람의 몸을 공중에 흔드는 그것들.

소리와 이미지의 꿰맴―이미지 트레이닝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미지는 이미지들의 잠행 속에서 완성된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의 껍질을 들고 있어도 이미지의 몸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꿰매주는 것이 이 거대한 시간판 위에서 소리들이 하는 일임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이미지의 시간판 위에서 앞으로 가고 있다. 그 껍질들을 흘리며. 그 껍질들을 다음 시간판 위에 흘리며. 잠행하려는 이미지의 껍질들을 흘리며.
 
시를 쓰고 있는 이들이여, 나의 나여, 너의 너여, 네가 시를 쓰고 있다면 그것을 소리와 이미지가 하나 된, 접시 위에 놓아라. 그곳 수족관의 가재와 같이 두 개의 안테나를 언어의 물 속에 끊임없이 흔들어라.
언어의 몸이 변모하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맑게 된다. 드넓은 이 어둠의 등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모든 소리들에게 이미지를 복구시키기도 하면서. 소리와 이미지의 꿰맴, 이미지와 소리의 교환이다. 결국 이미지 트레이닝은 우리에게 치유의 효과를 줄 것이다. 시의 손을 잡을 때 그 치유는 당신에게로 건너올 것이다.
시를 쓰는 이들은 모름지기 그 안테나를 잡아야 할 일이다. 안테나가 있는 가재를 요리해야 할 일이다. 가장 맛있게. 그 공간을  접시 위에 얹을 수 있어야 할 일이다. 소리의 홀몸과 이미지의 뼈를 꿰매어라. 그렇게 시의 혼이 되어라. 시를 살아라.
그 여자는 이제 완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지와 소리를 꿰맬 수 있으며 그래서 늘 하루 동안 시간판 위를 잠행하던 이미지와 소리를 집으로, 그 여자의 방안으로 데려왔다. 그 여자의 시적 자아는 그 최후의 도착지 방 밖에서는 늘 죽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일터의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집으로 오는 신호등들이 늘어선 그 길 위에서부터, 그 여자의 혼은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여자는 그 여자의 주인공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 여자는 주인공들에게 신호등 앞에서는 어떻게 멈추는지, 또 신호등이 어떤 색깔로 변하면 그 길은 건너갈 수 있는 길이 되는지를 가르쳐준다. 주인공들은 피가 흐르며 서로 부르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이 걷기 시작하는 그 거리는 이전의 그 거리는 아니다. 시간판 위의 무대이다. 소리와 이미지가 따로따로 들끓던 속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옷을 주웠다 놓으며, 그 속으로 이미지의 어깨를 흔들며 걸어가는 주인공들, 또는 소리의 눈초리만을 팔락이며 걸어가는 주인공들, 그 여자의 혼 밖의 사회는, 시간 판 위의 벽들은 저물녘 차려지는 그 여자의 시간판 위에서 이미지와 소리가 따로따로 잠행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시선이 투과될 수 있는 상황으로 변모한다.
그 여자의 집에는 흰 그늘이 있다. 플라타너스 흰 그늘도 있고, 달리는 트럭 위의 하늘의 구름 흰 그늘, 그리로 달려 지나가던 바람의 흰 그늘, 아버지의 흰 그늘, 어머니의 흰 그늘, 늘 그 여자의 아버지의 등 뒤에 달려 있던 허공의 흰 그늘도 있다.
트럭 위의 흰 그늘의 상황이 언어의 몸으로 변모하는 무대, 그러니까 그 여자의 방 속에 차려지는 무대, 거기선 끊임없이 결혼식이 열린다. 소리와 이미지가 주례인 언어 선생님을 가운데 모시고 결혼한다. 결혼식의 끝에는 늘 합방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미지와 소리는 한 몸으로 꿰매진다. 이미지와 소리는 피를 건너 교환된다. 이미지는 소리로, 소리는 이미지로 교환된다. 나의 무대는 너의 무대로, 교환된다. 나의 시적 자아는 너의 시적 자아로 교환된다. 시간판 위의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 교환된다.
아직 무명의 시인들이여, 나의 나여, 너의 너여, 나의 너여, 너의 나여, 이미지와 소리를 함께 꿰맬 언어 앞의 결혼식을 열어라. 이미지와 소리가 언어 앞에서 한 몸이 될 합방의 상황들판을 만들어라.
그 여자는 창문을 닫는다. 어둠의 입을 닦아준다. 이미지와 소리를 거기 단단히 가두기나 하려는 듯이. 현관문의 잠금 상태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모든 문을 꼭꼭 잠근다. 이미지와 소리여, 언어 위에서만 흘러나오라, 그 언어 위에서의 소리길 위에서만 교환되어라, 너와 나, 트럭 위에 앉아 있는 이와 재봉질하는 이와, 시장판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고사리를 들고 있는 이와, 모든 나/들과 모든 너/들,  교환되어라, 끊임없이 중얼대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