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창작의 과정과 실제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써야 좋은 시가 되는가. 시를 쓰고 고치는 데 왕도는 없는가. 이 끝없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 시가 있고 오늘도 누군가 어디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정의는 그런 대로 앞장의 「시란 무엇인가」와 뒤의 「시학의 날개」에 자세히 밝혀놓았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그 중 하나의 명제에 동의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설사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명제를 찾지 못했다면 시에 대한 정의는 오류의 역사이며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창작 실기라는 또하나의 문제 역시 만만치 않다. 앞장의 「시창작 소프트」에서 가능한 대로 시창작 실기에 필요한 것을 망라해 보았지만 그 글만으로 시창작의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로써 문제가 풀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시에 대한 모욕이 되리라는 내 생각은 결코 과장이나 비약이 아니다. 시란 바로 그것을 하려는 자의 영혼이다. 그 영혼은 삶을 살고 있으며, 그 삶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한뼘씩 배밀이를 해나가는 전신포복에 다름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시예술만은 꽤나 수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쓰거나 읽는 데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또 그런 준비과정에 동의하는 사람 역시 막상 자신이 시를 읽거나 쓸 경우에는 글과 말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주 허술하게 덤벼든다. 가령 피아노 레슨이나 회화의 데상 레슨과 견준다면 시공부하는 사람의 수련도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비교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시창작 과정과 실제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이러저러하라는 말을 하기보다 차라리 내 개인적인 체험에 의존하는 것이 쓰기에도 편하고 읽는이의 입장에서도 효과적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시를 처음 시작할 무렵의 나는 시란 것이 감정의 발산인 것으로만 단순하게 이해했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내가 외롭고 쓸쓸한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란 생각을 충실하게 종이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 행위는 한동안 나를 기쁘게 하고 들뜨게 했다. 쓰고 나면 막혔던 가슴이 뚫린 듯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자 그립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그대로 문자화시키고서 한 편의 시를 썼다고 우쭐거리는 것도 시들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밤낮 같은 소리를 쓴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조금 다르게(제대로 고백하자면 멋지게) 표현하고 다시 우쭐거릴 때도 있지만 그 기쁜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만 지나면 약효가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립다’고 내 자신이 선명히 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냉정해진 나는 그 말이 한두 시간 전에 내 자신이 써놓은 그 말인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와 같이 지리하고 짜증나는 되풀이를 거치는 동안,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시차에 약간씩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두 시간에서 서너 시간, 이윽고 어떤 때는 사나흘쯤 뒤에 가서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게끔 사뭇 뻔뻔해졌다. 뿐만 아니라, 시는 그립다를 그립다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안그립다고 써야 그리운 것이라는 역의 논리도 개발하여 스스로를 다구치고, 휘두르게끔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의는 최초의 정의보다 약간은 근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다만 생각하는 시간도 웬만큼 길어졌고 시구를 다듬는 시간도 늘어난 때문인데……. 그 무렵의 나는 역의 논리로 하여 한결 더 시 같아진 것으로만 착각을 한 것이다. 이윽고 나는 자신의 착각을 깨닫게 되었다. 시란 무엇이냐는 끊임없는 반문 또한 이 무렵에 비로소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질의와 답의 반복적인 훈련은 시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를 확립해 나가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쓰고 난 뒤 또 하나의 새로운 명작을 세계문학사에 편입한 양 도연한 기분으로 한 6개월쯤 지났을 무렵, 내게는 또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 같은 것으로서, 예컨대 하늘의 달을 노래한 나의 시가 같은 달을 노래한 명가(名家)의 달과 어째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의문이자 질투심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사물에는 합당한 하나의 단어밖에 없다는 서양의 일물일어식의 사고방식에 잘못 감염된 결과였다. 그 격차로 하여 번민과 초조에 싸인 채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는지 돌이켜보기조차 싫었던 한 추억이 가슴에 심어진 그 무렵의 내 나이는 열 대여섯살 가량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하나의 탈출구를 만들어야 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아무도 써보지 않았던 주제, 시로 나타난 바 없는 사물에 대해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대어보자,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문제점이 저절로 해소될 수 있지 않은가. 풀어 말하자면 견주어볼 잣대가 필요없는 작품을 써보자는 으뭉함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방법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준비과정이 필요하였다. 우선 누가 무슨 시를 이미 써서 발표하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발표된 시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이 발표된 모든 시를 읽어치워야 했다. 그것은 굉장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한 일이년간, 나는 학업마저도 소홀히 한 채 오로지 읽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신들린 것처럼 갖가지 시집에 매달리고 있었던 그때의 나를 보고 착하기만 하신 무학의 어머니가 학교공부를 하는 것으로만 여기셨던 일은 지금도 내 가슴에 굵은 못이 되어 박혀 있다. 하지만 다행한 일은 그 무렵만 해도 지금처럼 출판이 활발하지 않은 때여서 내가 읽어야 할 시집의 수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번역된 것까지 쳐도 그랬다. 그래서 부족한 시 독파의 양을, 문학잡지에서 찾기로 하였고, 그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의 내 책가방은 도중의 서점에서 구입한 고본 문학잡지들로 불룩하였을 뿐아니라, 남은 한 손에는 으례 몇 십권의 묶음이 들려 있게 마련이었다. 을지로 5가 근처에 살고 있었기에 주변의 동대문 일대의 서점이란 서점은 다 거칠 수 있었을 뿐 아니라……고마우신 어머니가 아낌없이 내 학구열(?)의 경비를 대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잡지를 구입하면서 내 숙제의 양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시만 골라 읽기에는 투자액이 아까워, 같이 수록된 소설이며 평론까지 아낌없이 읽어버리게 된 것이다. 문학에 대한 갖가지 이론과 작품, 그리고 그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한 시와 그에 대한 구구한 논의를 읽어나가는 동안, 내 혼란된 머리는 서서히 정상을 되찾기 시작하였고, 사물에 대한 내 눈길도 전과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하나의 사물이란 누군가 불러주는 이름에 의해 새로이 태어나게 되는 것임을 깨닫고, 내가 붙여야 될 이름, 그것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것은 시에 대한 나의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한 최초의 정의였다고 지금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로부터 이제도록 나는 한 편의 시란 하나의 이름이며, 그 이름이란 사람의 감정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고 생활일 수도 있다는 갖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를 골라잡았다가 버리고, 버렸다가는 다시 손에 쥐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버리고, 갖는 가장 단순한 행위의 되풀이로 하여 이윽고 하나의 내용이 정해지고, 그 내용에 합당한 이름이 붙여지는 이러한 과정이 곧 시작(詩作)의 절차라 할 수 있다. 예컨대 한때 내가 열중했던 옛 인물들의 시화(詩化)에 있어서도 이러한 방법이 적용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허균(許筠)을 들어보자. 허균은 알다시피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서 국문학사에 길이 남은 소설 『홍길동전』의 작자이자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운하여 붕당 사이를 떠돌아다님으로써 많은 욕을 먹었고 끝내는 서얼들과 무리를 지어 난을 꾸미다가 붙잡혀 처형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의 오빠이기도 했다. 이 일대의 재사를 시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능한 대로 그의 모든 것(정보)을 알아야 했고, 그 다음에는 되도록이면 모든 것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고 버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지워지지 않은 몇 개의 분명한 사실이 남았을 때, 그때 비로소 나의 시는 첫구절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허균의 눈이며 코를 그리거나, 얼굴이 어떤가를 묘사하기보다는 그가 누구인가를 나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전개된다.
지난 여름에는 洪吉童의 나라 聿島를 다녀왔습니다. 마침내 내가 보여주게 된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이상향인 율도를 사실상의 섬으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안되게끔 모든 상황이 감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구절은 다시 반전하여 그곳이 실은 사실상의 섬이 아니라 상상의 섬임을 밝힘으로써 사실과 상상이 같이된 상태로 치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로부터 허균에 대한 시는 자연의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시인의 개입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시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땅치 않은 구절이 들어오면 시의 강한 반발이 인다. 이 논리화할 수 없는 시의 생명력, 그 스스로의 작용을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불가능이 시 안에서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작동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우연은 필연이 될 수 있듯이 나는 상상 속에서 상상의 공기를 마시고 상상의 하늘을 보고, 상상의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시를 위해 처음부터 예비되어 있던 것들이며, 동시에 버려져야 할 것들은 모두 버려져 있었던 상태임이 확실하다고 적어도 나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다. 여자들의 몸 안에서 하나의 생명이 자리잡고,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해 세상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듯이, 시의 이미지란 시인의 내부에서 생명의 출산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율도」의 전문을 보기로 하자.
지난 여름에는 洪吉童의 나라 율도를 다녀왔습니다. 율도 그곳은 사실 상상 속의 섬입니다. 小說家 許筠의 소설 속에 그려진 이상의 나라입니다. 그의 별명은 올빼미로서 敗類와 즐겨 노닐었다 합니다. 그는 또한 머리며 두 팔 두 다리 몸뚱이가 제각기 찢겨져 죽음을 당했던 비운의 혁명아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율도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섬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춘섬이의 아들 吉童이가 임금으로 있다는 율도는 지도의 어느 곳에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녀왔습니다. 율도의 공기를 마셨고 율도의 하늘을 보았고 율도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許筠은 그곳에서도 또한 머리며 두 팔 두 다리 몸뚱아리가 찢겨져 아무렇게나 길가에 나뒹그라져 있었습니다. 명아주풀 한 포기가 다만 그의 영혼을 받아들여 바람이 불 적마다 시나브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聿 島」
「율도」를 발표하면서, 잡지사의 주문대로 조그만 메모를 달아놓았다.
세번째 시집 『律』을 내놓고 한동안 시를 잊고 지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율도」는 그후의 네번째 작품이었다. 「古山」은 金正浩, 「玆山」은 丁若銓, 「梅月」은 金時習, 그리고 이번의 「聿島」는 許筠과 연결되었다. 앞으로도 나는 우리 정신사의 한부분인 이들 한국인들과 연결시켜 작품을 쓰고자 한다. 그러나 평전이 아니다. 언제나처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함을 쓸 뿐이다.
하지만 시가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았노라고 게염을 부리고 싶은 나이가 되어도, 처음 시를 쓰겠다고 달려들던 그때처럼 시를 모르기에는 매일반인 것만 같다. 그것이 비록 단순한 감정의 발산이 아님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발산이라는 면에서 바라보기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내게 있어서의 시란 끝없는 발산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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