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江景), 잔광 부신 강마을과 박용래 ― 시가 있는 문학 기행
손 종 호
강경에 이르면 시간은 유난히 천천히 흐른다. 그것은 금강 상류로부터 서서히 밀려와 쌓이면서 어느덧 뱃길을 막은 토사의 완만한 흐름과도 같다. 성어기인 3월부터 6월까지 넉 달 동안이면 하루 100척이 넘는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는 어디로 갔는가, 중얼거리며 금강 둑가를 서성이는 낮은 구름의 소요와도 같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기러기뗄 보아라 아 어느 강마을 잔광(殘光) 부신 그곳에 떨어지는가. ― 박용래, 「막버스」 전문
1979년 ≪심상≫ 5월호에 발표된 이 시는 마치 오늘날의 강경을 그린 것만 같다. 강경은 “잔광 부신” 강마을처럼 옛 영화를 가슴에 안고 금강 가에 길게 누워 있다. “내리는 사람” “막버스” “기러기떼” “잔광”은 한결같이 하강하고 사라지며 침강하며 겨우 남아 있는 이미지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밝은 현실도 미래도 아닌 과거로의 소멸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 추억의 빛바랜 풍경의 한 모퉁이에 박용래가 있다. 강경은 박용래를 닮았다. 아니 박용래는 강경을 닮았다. 강경에는 쇠락함 속에도 여전히 기품이 배여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만만치 않게 큰 시장의 규모를 보면 평양, 대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상권을 형성하던, 아니 금강을 거슬러 올라 중국의 무역선이 닿을 만치 큰 문물의 교역처로서의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박용래의 시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일체의 것들을 버리고 선 겨울나무처럼 단단한 골격을 유지한다. 선비의 지조 운운할 수는 없지만, 때로 푸성귀처럼 연약해 보이는 시행조차 손닿는 순간 야무지게 저항하는 개성이 있다. 박용래는 강경 중앙동에서 태어나 강경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은행에 취업이 되어 서울로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소지주이자 한말 유생의 4남 1녀 자녀 중 막둥이로 태어난 그를 강경은 이 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눈물이 많고, 담긴 것이 많지 않으나 꼭 담길 것만 담겨 있어 더욱 소중하며 간절한 서정의 시인으로 키운 것이다.
일년 열 두달 머뭇머뭇 골목을 누비며 삼백 예순 날 머뭇머뭇 집집을 누비며 오오, 안스러운 시대(時代)의 마른 학(鶴)의 낙루(落淚)
슬픔은 모른다는 듯 기쁨은 모른다는 듯 구름 밖을 솟구쳐 날고 날다가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 박용래, 「학의 낙루」 부분
박용래 시 가운데 보기 드물게 포우즈가 큰 이 시는 “외로움” “괴로움” “구차함” “억울함” “머뭇머뭇” “안스러운” 등의 시어가 지닌 삶의 곡진한 정서들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고 “모른다는 듯” “솟구쳐 날”음으로 초월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마른 학”이 떨구는 눈물이 된다. 박용래의 삶이 어떠하든 “머뭇머뭇 골목을 누비며” “머뭇머뭇 집집을 누비며” 술에 취해 살아온 구차한 삶, 안스러운 삶으로 비춰지든 어떠하든 그의 눈물이 “마른 학”의 눈물로 승화될 수 있는 힘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 것일까. 비록 안스러워 보일지라도 박용래는 여전히 옛 영화를 안고 있는 “잔광 부신 강마을”의 사내였던 것이다. 충청도 토박이 가운데 칠순을 넘긴 분들은 유독 강경을 ‘갱경이’라고 발음한다. 하긴 학교를 ‘핵교’로, 서산이라는 지명조차 ‘스산’이라 발음하는 것을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박용래를 포함한 이들 연배의 사람들은 강경이 아니라 ‘갱경이’에 산다. 그리고 그 ‘갱경이’는 그들만이 아는 또 다른 세계이다. 박용래는 세 번째 시집 『백발의 꽃대궁』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하눌타리,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수레바퀴, 멍멍이, 빈잔 등은 내가 찾는 소재. 우렁껍질, 먹감, 진눈깨비, 조랑말, 기적(汽笛), 홍래(鴻來) 누이 등은 내가 즐겨 찾는 소재. 옷을 깁고 싶다. 당사실 같은 언어로 떨어진 시인의 옷 을 깁고 싶다. 한뜸 한뜸 정성스레 깁고 싶다.
그가 즐겨 찾는 이 모든 것들은 강경이 아니라 ‘갱경이’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논산에서 국도를 따라 강경을 향하면 좌우에 너른 들판이 전개되고 오른 쪽에 채운산(彩雲山) 자락이 펼쳐진다. 논산 관촉산 쪽에서 보면 해는 언제나 채운산 쪽으로 기울어 말 그대로 구름을 붉게 채색하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채운산을 노을이 깃드는 ‘놀뫼’ 혹은 ‘황산(黃山)’이라 부른다. 이처럼 노을이 아름다운 채운산 자락과 넓디넓은 들녘, 그리고 놀뫼나루와 황산천, 황산교 등, 산과 강과 들녘이 어우러지는 이 모든 자연 환경은 박용래 시심의 원천을 이룬다. 아름다운 사계절로 이어지는 강경의 자연이 박용래 시심의 바탕을 이룬다면, 그것의 내면화는 누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 뿐인 누이를 무척 따르며 성장하던 막내는 누이가 강 너머 부여군 세도면으로 시집간 후 좀체 말이 없어져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옥녀봉에 올라가 강 건너를 바라보며 누이를 그리워하거나 아니면 좀체 방안을 떠나지 않는 ‘방안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중학교 2학년 때 시집 간 누이가 초산의 산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박용래의 시가 앞으로 나아감보다 오히려 뒤로 물러남의 공간에서 작은 것, 사라져 가는 것, 좀체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 애정을 기울이며 눈길을 주고 있음은 누이의 죽음 이후 겪어야 했던 이러한 내면화 과정과 무관치 않다.
오동(梧桐)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 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 ― 박용래, 「담장」 전문 누이의 죽음은 일체의 분노조차 가리우는 삶의 힘을 이룬다. 그것은 생활 가운데 더디고 느리게 와 닿는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의 애환과 고통을 이기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성은 각성일 뿐, 박용래는 자신의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귀향을 원치 않았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 누이”의 추억이 그를 막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귀향하지 않되 이미 오래 전에 귀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갯벌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白江下流 노을 밴 黃山메기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 박용래, 「황산메기 ― 곡(曲)」 전문
박용래는 평소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의 반쯤만 창문을 열고 본다’고 즐겨 표현하곤 하였다. 그렇듯 그는 어느새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 하류에 “노을 밴 황산 메기”가 되어 고향에 깃든 것이다. 그의 시 「자화상 3」에서 “살아 무엇하리, 살아서 무엇하리” “죽어 또한 죽어 무엇하리” 외치던 그답게 박용래는 이미 채운산의 노을 속에, 들녘의 허수아비 곁에, 아니 백강의 하류에 깃든 영원한 숨결로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아니 그를 키운 ‘갱경이’, 잔광 부신 강마을에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며 그는 여전히 “보름 장날 막버스”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손종호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와 문학사상 신인상 등단. 시집 ꡔ투명한 사랑ꡕ 등. 현재 충남대 국문과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