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똥나무를 읽다 / 안영희
양귀비 같은 봄날이라,
목마름도 흠뻑 바람조차 그만이라
덩달아 쑤욱쑥 하늘로
깃발을 흔들어서는 안 되지
자작나무 버드나무 미루나무 나무나무나무
목욕 끝낸 후 풀어헤친 머릿단들
봄볕의 흰 손가락 애무하는데
자를 댔었나 봐 수평도 저리 반듯하게
산목숨을 친 직각의 초록면 색 부셔라
전지가위질 당한 쥐똥나무들
너는 나무가 아니고 울타리였었지
사람의 허리께 이상 키를 올려서는 안 되는 거였지
보기 좋은 것들 더욱 돋보이게끔 몸 낮춰 에워싸는
세상의 보조물, 주인공들 잠들지 말고 지켜 줘야 할
너의 배역은 키 작은 불침번
수십 층 밀집빌딩 도심의 뒷그늘에
유독 주소 튼튼히 뿌리박는, 치사량의 공해도
밥으로 식사할 수 있는
목숨의 힘이 무엇인 줄 아느냐
자라는 대로 윗동이 잘리면
팔다리가 그대로 무기일밖에 없는 슬픔을 아느냐,
이 아침 다시 잘려
아, 아, 아… 토해내고 있는
쥐똥나무, 저 치명적인 향내!
시집<내 마음의 습지> 2008년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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