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저 붉은 꽃잎 / 이영선
지난 봄 옻칠한 식탁 앞에는
네 개의 의자들이 묵언수행 중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른 식탁 등 뒤에 두고
개수대 앞에 서서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
찬도 별반 없이 우적우적 씹는
이것이 밥인지 쓸쓸함인지
영치금 같은 밥덩이를 삼키며
얼마나 자주 목이 메었는지
북쪽머리 쪽창에 잘린 개나리 아파트
다문다문 불 켜진 창살도 다정해라
애살 돋우는 저녁불빛
식구들 끼니 걱정 핑계 삼아 몰려오고
약속이라도 한 듯 수신음이 울린다
오래된 놋주발처럼 삭은 오기라도 부리며
밥 한술 떠넘기는 어둑한 부엌
등 돌려 불을 켜야 하는데
누굴까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부엌을 버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저기 저 붉은 꽃잎 떼 몰고 가는 이는
시집 <집을 지나치다> 2008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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