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포트레이트 / 곽은영
이제 나는 더 이상 바람의 아이를 낳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요
우산을 들고 지붕에 앉아 백묵으로 날짜를 긋지 않아요
엄마, 난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의 머리칼을 빗겨줘서 그렇단다, 기다리렴
그러나 엄마, 엄마가 죽은 날 알아버렸어요
내가 바람이라는 사실을
이게 무슨 냄새야 아침마다 벌컥 창문을 열던 아빠,
내가 밤마다 꿈속에서 춤추고 온 묘지의 냄새를
온 집안에 뿌려놓았어요
어쩌면 좋아, 이젠 다락방에서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을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구두는 애초부터 없었어요
이곳은 대대로 내려오는 짐승들의 땅
코는 바닥의 냄새를 맡도록 아래로 열렸고
망할, 넌 열성 유전자를 긁어 모아놨어
소리를 지르던 고모, 사랑해요
돌들이 부딪치며 숨겨놓은 불을 토하듯
나는 당신들의 털가죽의 부대낌에서 태어났어요
불쌍한 엄마, 나를 위해 갈색 털가죽을 입힌 엄마
얼룩덜룩 털가죽은 헐렁해서 사진 속 나는 두려웠어요
그러나 이제 나는 두렵지 않아요
내가 울었기 때문에 풍향계는 늘 부러졌어요
여행가방은 필요 없어요 모자 하나면 충분한 시간이 왔어요
지붕 위에 상냥한 에이프런을 넣어주세요
빨간 하트가 하나씩 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은
명랑한 나의 안부 인사에요
상큼한 나뭇잎이 찰랑거리고 있어요 라임의 바다가 나를 불러요
당신들을 사랑해요 지금은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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