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신춘문예 詩 당선작

[2020 매일신춘문예]시 당선작-최선 (본명 최란주)|▒

문근영 2020. 1. 2. 17:57

[2020 매일신춘문예]시 당선작-남쪽의 집수리


당선인 최선 (본명 최란주)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

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

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

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

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

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

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

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

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

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

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

 

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

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

 

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

중부지방의 방식으로 남쪽의 집 수리를 부탁하고 보니.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아니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서 계약이 성립된다.

산수유 꽃나무가 화르르

허물어지고 있을 것이다.




당선인 최선 (본명 최란주) “저의 빈 공간에 꾹, 참았던 한 호흡을 담겠습니다”


   

고향에 가면 저와 나이가 같은 산수유나무가 있습니다. 참 부지런해서 봄에 노랑으로 바쁘고 가을엔 빨강으로 바쁜 그 친구와 해마다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이 노랑으로 시작해서 빨강으로 끝이 나는 동안 저는 한 번도 약속을 성실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지친다는 것은 어딘가 부족했다는 뜻일 겁니다. 당선통보전화를 받는 그 순간에도 최선의 봄과 겨울이 교차하며 지나갔습니다. 지금쯤 고향의 산수유나무는 겨울잠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실눈을 뜨고 저에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주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주신 부모님, 부족한 저를 많은 인내심으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격려를 해준 남편과 동생들에게도 감사하고, 응원을 해준 문우들과 직장동료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빈곳이 있어 통이 존재하겠지요. 어떤 견고한 진공에도 한 호흡,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앞으로 쓰는 시들이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단 한 줄의 언어가 '그래 맞아 나도 이런 느낌이었어.'라는 공감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이제 저의 영혼, 비어있는 공간에 꾹 참고 있는 한 호흡을 담겠습니다.

그리고 동년배인 산수유나무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킬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것이 노랑이든 빨강이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위원 이태수 ·송찬호

       

본심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최종까지 논의된 시는 김지영 씨의 '간기 벤, 교차로', 김은 씨의 '태양을 가동하는 방법', 최란주 씨의 '남쪽의 집수리' 등 세 편이었다.

'간기 벤, 교차로'는 남해섬 일대의 땅과 바다에 깃든 삶의 욕망과 열망을 차분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특히 계단식 논이 많은 다랑이 마을의 풍광에서 삶의 그늘과 쇠락한 시간의 주름을 읽어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일부 언어가 평이하고 관념적인 사변의 진술로 치우쳐 시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태양을 가동하는 방법'은 역동적인 언어와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는 검은 폐유를 닮은 그림자들이 흘러나왔다"는 시구 같은, 현대 도시 문명의 음울함을 가리키는 선명한 이미지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같이 응모한 작품들도 안정되고 개성이 두드러졌지만, 시에 힘이 너무 들어가 경직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지켜보며 다음을 기대해볼 수밖에 없었다.

'남쪽의 집수리'는 눈에 번쩍 띄는 시였다. 꽃핀 산수유나무를 매개로, 자연과 계절의 변화과 순환에 따른 삶의 이치를 시로 넌지시 일깨우고 있다. 봄이 오면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게 아니라, 산수유나무도 '집수리'라는 부단한 자기 삶의 갱신으로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꽃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라고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삶의 시차와 간극을 좁힐 수도 없고 매양 어긋나기만 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불화를 체감하면서도, 북상하는 꽃소식에 귀 기울이며 봄이 오는 길목 어디쯤에서 자기 나름의 '남쪽의 집수리'에 골몰하는 인간살이를 적실한 언어로 표현했다. 요란한 시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도 시의 깊이와 무게를 확보한 좋은 예이다.

최란주 씨의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고르고 높아 치열한 습작의 모습이 엿보였으며,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아도 신뢰할 만했다. 주저 없는 의견일치로 '남쪽의 집수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이태수(시인)·송찬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