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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4회 한국서정시 문학상 및 시사사 작품상

문근영 2019. 2. 11. 10:10

■ 제4회 한국서정시 문학상및 시사사 작품상

□ 제4회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작

맨드라미의 시간에

김승희


꽃이 도마에 오른다
말도 안되는 희망이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 꽃이 도마 위에 놓였다,
계절따라 피는 꽃들도 도마 위에 오르면
오스스 소름이 오른다, 소름이 돋아 피가 뭉쳐
도마 위에서 꽃은 붉은 볏으로 솟아난다,
얼굴이 빡빡 얽은 붉은 얼금뱅이가
고장난 시계를 안고 도마 위에 꽃밭에 만발한다,
도마 위에선 내일이 없기 때문에
두 눈 뜨고는 앞을 못 보기 때문에
내일이란 말을 모르는 맨드라미 얼굴에 붉고 서러운 이빨이 돋아 난다
터널 끝에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맨드라미의 시간이라 부른다

피안을 거슬러
화단의 모든 꽃들과 돌들이 혹서를 치르고 있는 어느 여름날
바위마저도 스스로 다비하는 듯
우리는 그런 시간을 뜨겁고 붉은
맨드라미의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러야 한다
해를 바라보며 목마름으로 더 타오르다 서서 죽는다.


ㅡ시집『도미는 도마 위에서』(난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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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1952년 光州 출생. 1973년〈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1994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산타페로 가는 사람』, 시집『태양 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미완성을 위한 연가』『도미는 도마 위에서』등.


□ 제4회 시사사 작품상 수상작

무늬

정다인


1
나는 당신을 본뜬 심장을 갖고 싶었다
세상을 훔치는 일정한 리듬과 비유를 가진
당신의 모국어가 되고 싶었다
당신으로 환승하는
레일 위의 기차

피가 흐르는 검붉은 감정을 연습하며
나는 조금씩 당신의 입김이 되었다
당신을 이식하며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보고 서 있다
당신이라고 되뇌는 나는 복제된 슬픔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당신
도무지 맞춰지지 않는 퍼즐처럼
엎드린 이교도의 멍든 무릎처럼

인화되기 직전의 표정들이 당신을 통과하고
나를 통과하고 마침내 하나가 되는
이상하고도 몽롱한 키스

2
당신과 나는 샴

분리될 수 없는 기형의 아름다움
침범할 수 없는 진공
천천히 녹슬어가는 벽 속의 구부러진 못
너무 많은 것을 주고받고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샴, 기억 상실의 바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 속에서
당신 속으로 빨려 드는 수없이 많은 나
내 속에서 자라나는 끝없는 당신

우리는 흡혈의 절정 속에서 다리가 사라지고
머리가 사라지고 가슴이 사라진다
사라지면서 알게 되는 우리라는
오래된 그물

나와 당신이 뭉쳐 다시 태어나는
낯선 눈빛들, 지나쳐버린 서로의 측면을
늘어놓은 채 서서히 번식하는
피가 흐르는 시간

3
한 걸음만 더 당겨주세요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는 당신의 체온이
나의 야경이 될 수 있도록

어둠 속 체위의 절반은 침묵의 변주
그 안에서 무한대로 번식되고 있는 나와 당신

어둠을 배경으로 흘러넘치는 곡선을 따라
우리는 한 소절 피 묻은 묵음이다

말하지 못하는 눈빛과
말문을 닫아버린 표정을 담고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지나친다
당신 속에서 허물어진 나와
내 속에서 빠져 나온 당신은 뭉쳤다 흩어지는
어둠의 입자들
멀어지면서 사라지는
걸음을 따라 야경은 차가워진다

4
피가 식어가는 당신과 나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는 무의미들,

한 걸음씩 천천히 광활해지는.


ㅡ『현대시』(2018,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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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인 : 경남 진주 출생. 2015년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 시집『여자 k』.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김도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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