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당선작 = 제목: 세신사
조각가가 꿈이었던 팔목 굵은 사내는
대리석 목욕대 위 모델을 흘깃 보고
한 됫박 첫물 뿌리며 데생을 시작한다
한때는 눈부셨던 세차장 사장도
지금도 눈부신 성형외과 의사도
실상은 꼼짝 못하고 몸을 맡긴 피사체
깔깔한 때수건 조각도처럼 밀착시켜
핏줄까지 힘주어 묵은 외피 벗겨내면
곧이어 환해진 토르소, 두 어깨 그득하다
수증기 송송 맺힌 목욕탕 한 편에서
날마다 극사실주의 석고 깎는 조각가
두 손은 북두갈고리 거친 숨을 뱉는다
◇ 시조 당선 소감/ 이현정
20대 중반 쯤엔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본 적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언젠가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드림리스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창작한 작품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꿈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여야 한다고 누군가 그랬던가요. 동사이다 못해 한 문장에 가까운 이 꿈은 오래도록 저의 드림리스트에서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았습니다. 갈망했지만 방법을 몰랐고 어둠 속에 혼자 벽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 전, 대학교 때 처음 제대로 접했던 시조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일상에 부대끼고 시간에 마모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글밥을 놓지 않으려 애써 온 시간이 지났습니다.
'세신사'는 철저히 픽션이지만, 내 글 아닌 다른 글밥을 더 많이 보고 쓰고 다듬으며 이것이 내 업인지 꿈인지 모를 혼몽의 일상을 살아가는 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치열하게 받아내고 있는 이 일상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결국 꿈의 형태를 좇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매일 거친 숨을 뱉고 있을 무렵, 당선 소식이 들렸습니다. 드림리스트에만 머물러 있던 활자가 입체로 살아 꿈틀대는 느낌이었습니다. 며칠 간 깨면 현실이 아닐까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드림리스트를 작성하고, 더 큰 꿈을 그리게 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합니다. 본인의 작품이 시인을 꿈꾸는 한낱 미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짐작도 못하실, 기라성 같은 선배 시조 시인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작품을 등불삼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도반이자 스승이 되어 주시는 두 분과 사랑하는 가족, 응원해준 친구들, 동료들께도 감사합니다.
제 시의 수많은 모티프가 되어주시고 근 20년간 저를 키워주신 할머니 홍복수 씨를 마지막 감사의 이름으로 올립니다. 당선 소감에 할머니 성함을 올리고 나서 직접 소식을 전해 드리지도 못했는데, 그 사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곳에 마지막으로 꼭 불러드리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처럼 업이 꿈인지, 꿈이 업인지 모르게 매일을 맹렬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북두갈고리' 손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지치고 거친 손을 역시나 지친 제 작은 손으로, 재주로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운김을 내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글로 더 많은 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뜁니다.
▶ 약력/ 이현정
1983년 안동 출생.
대구교육대 국어교육심화과정 졸업.
중앙 시조백일장 장원(2017), 차상(2018).
대구시교육청 학교생활문화과 재직
◇ 심사평
여러 문학 갈래 중에 시조를 선택한 이들에게 묻고 싶다. 왜 하필이면 시조인가? 생뚱한 이야기일는지는 모르지만 시조를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남다른 소명의식이 요청된다. 또한 시조를 쓰겠다면 무엇보다 시조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 형식이 자신의 체질에 잘 맞는지 면밀히 자체 검증해 보아야 한다.
진정 영혼의 자유로움을 갈구한다면 3장 6구 12음보라는 정형의 틀을 가진 시조는 높은 장벽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천명할 수 있는 것은 틀이 마냥 정신을 억압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조 형식을 잘 숙지하게 되면 틀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때 틀은 틀이 아니라 개성적인 기율로서 생명력을 확대·재생산하는 창의적 의미공간이다.
400편에 가까운 작품을 읽으면서 시종 마음이 들렜다. 독해의 즐거움이 컸고 무엇보다'또 다른 목소리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열독 끝에 마지막까지 눈앞에 남은 이는 이현정, 김나비, 황혜리, 김향미였다. 이들은 일정 수준을 보여줬고, 나름대로 치열한 예술적 쟁투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역력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현정의 '세신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세신사'는 공중목욕탕에서 몸의 때를 미는 일을 하는 사람을 등장시켜서 '인간의 길'을 탐구한 점이 이채로웠다.
당선작은 신인으로서 만만찮은 패기와 저력이 뒷받침된 역작이다. 진정한 삶의 길이 어떠해야하는 지에 대해 치열하게 궁구하면서 시종 한 호흡으로 밀고 간, 네 수로 직조된 인생보고서이기도 하다. 당선이 문학적 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제 겨우 구름판 하나 장만한 것일 뿐이다. 모름지기 앞으로 이 영예에 값하는 부단한 정진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시조는 세계와 삶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 여전히 유용하다. 응모자 모두 마음을 다잡으며, 시조 쓰기를 향한 열정의 불길을 꺼뜨리지 말기를 당부한다.
심사위원: 이정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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