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하늘나라 / 이진명

문근영 2018. 12. 20. 02:38

하늘나라


  이진명



하늘나라가 있다지요

나선의 계단을 돌아 가파르게 오르면

종루가 있고

종루 위에는 높다랗게 십자가가 있어

아, 하늘나라가 있다지요

나는 잘못 찾아간 약도를 구깁니다

여기로 저기로 방향을 가늠해 봅니다

해 지는 저쪽, 부서져 가는 건물,

저건 샛문일 테지요, 비밀스러웠어요

촛불을 준비하고

그 샛문 지하 통로로 내려갑니다

튀어나온 벽에 얼굴을 긁히고

온 손에 거미줄 붕대를 감으며

드디어는 저 끝에 빛,

대리석 궁전이 보이는 뜰에 들어서서

연못 속에 잠긴 붉은 원기둥

원기둥에 매여 흔들리며 잠든 황금빛 새

내 약도로는 갈 수 없는 것일까

다시 잘못 찾아간 길을 돌아서 나옵니다

해진 약도를 바람에 떨구며

방향도 없이 고개를 젖힐 때

그 광야와 광야

모래 바람에 파묻힌 칠현금 소리

하늘의 커튼이 나부끼는 사이 그 사이로 언뜻

나비 같은

물들어 오는



    -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민음사, 1992)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