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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3회 애지문학회 작품상 후보작 10편

문근영 2018. 12. 20. 02:20

<제3회 애지문학회 작품상 후보작 10편>                   

 

 

불멸의 그 여자

                                     조옥엽




텅 빈 허공을 점박이 하이에나처럼 홀로 떠도는 여자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광활함에 그만 말을 잃어버린 여자

 

그러다 저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벙어리가 돼버린

수많은 죄 짓고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다 엉치뼈만 덩그마니 남은 여자


제 보기에도 이건 아니지 싶어 맘 고쳐먹길 수백 수천 번

그러나 웬걸 사흘도 못 가 다시 체중 미달로 분류되고 마는 가량가량한 여자


골골하면서도 병가는커녕 조퇴 한번 해본 적 없는 강단진 여자


지나새나 소리를 삼켜버린 짐승의 발자국처럼 고요한 여자


수걱수걱 정해진 외길만 오갈 뿐 한눈팔 줄도 해찰할 줄도 모르는 직심스런 여자


날마다 꿈을 꾸는 여자, 그리고 그 개꿈 철썩 같이 믿고 사는 어리숙한 여자


장신구는 물론이고 집도 절도 하다못해 말벗 하나 없는 가난한 여자


그러나 그딴 것에 맘 써 본적  없다는 듯 팽팽히 고갯마루 넘어서는 고고한 여자


천 년이 가고 만 년이 가도 끄떡없을 불멸의 여자


그러나 그게 하늘이 내린 축복인지 형벌인지조차 모르는 어리버리한 여자


그리하여 애먼 생각의 실꾸리만 풀었다 감기를 되풀이 되풀이하는 여자


그러나 실은 너와 내가 흘린 눈물 받아 삼키느라 그딴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달이라는 이름으로 밤마다 우리들 들창 두드리는 수삽한 여자 


ㅡ『 현대시학 』2016년 8월호 







고전적인 불볕

                                  강서완




  

그러면 칸나는

 

줄 없는 기타로 어떤 색을 노래할까?

 

슬픔을 쏟아낸 살결처럼

어둠은 빛의 내면을 찾아가는 것

 

몸으로 말해야 할 때

삶은 가장 단순해진다

 

날아오른 무용수가 몸을 펼치듯

더위를 껴안은 칸나는

팔다리와 웃음이 복원된 토르소다

 

헝클어진 빨강, 폐기된 사물, 허공의 바리케이드, 과거의 해독에 골몰한

 

폐허를 밤이슬에 씻던

 

칸나,

 

발톱에 동여맨 붉은 노래, 부르튼 잎들이 지런지런

 

쏟아지는 역광을 끌어안는다


 - 시집『서랍마다 별』(2016)






.

주술사

                                      황봉학 


 

   

 

태초에 땅에는 검은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로 점을 치는 주술사가 있었다

그는 돌에서 화살촉을 꺼내 이리떼를 죽이고 곰을 죽였다

이리와 곰을 먹고 자란 그는

주술의 힘을 빌려 다른 종족의 머리에 화살을 박았다

화살촉이 두려운 종족은 그의 종이 되고

그는 돌에서 황금을 꺼내 왕관을 만들고

자궁을 향락이라는 이름으로 병들게 했다

그는 돌에서 탑을 꺼내 신전을 세우고 신을 만들었다

주술의 힘은 악어의 자궁보다도 강하다

그는 마침내 돌에서 우라늄을 꺼내 스스로 신이 되었다

주술 한 마디로 이 땅을 또 다른 돌로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또 다른 주술사가 탄생하는 것이 두려워

주술 읊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주술사는 태초에 어둠에서 태어난 것임을 그는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땅 곳곳에서 새로운 주술사가 태어나고

주술의 힘을 믿는 그들은 또 다른 종족의 머리에

잘 다듬어진 돌을 겨눌 것이다

                           

시집『주술사』(2016).





주물

 

                                 안희연




불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손이 있다

얼어붙은 영혼의 정수리에

콸콸 불을 쏟고 사라지는

 

나는 매일 밤 그를 찾으러 다닌다

다신 나를 깨우지 마세요

나에게 진짜 죽음을 주세요

 

간청해도

얼굴은 녹아내린다

 

아침은 뭉개진 얼굴을 갖는 시간

의미를 찾아보라고

하루라는 틀 안에 갇힌 우리

 

굳지 않는 하루는 없다

서둘러 발목 밖으로 발목을 꺼내야 한다

 

어떤 날은 장미 가시 끝에 맺힌 물방울

어떤 날은 불타버린 집

나도 모르는 내가 되어서

 

매일 더 낯선 곳에서 멈춰 선다

밤은 얼굴을 부정하기 위한 시간

 

완벽한 악몽을 제작하려는

신의 담금질은 멈추지 않는다

밤새도록 귓가를 맴도는 망치질 소리

물속으로 머리채를 끌고 가는

   

                         —《현대시학》2016년 3월호





 

수색 (水色)

                                      이미산


 

흘러가거나 출렁이는

 

물빛 정류장에 서 있다

내 눈에 고인 눈물

떠있는 구부러진 무릎

 

정지한 듯 그러나 이끌리듯 흘러가는

나는 또 손을 내밀어 잡힐 듯 멀어지는 우리의 거리를 확인한다

약간의 굴절 약간의 흔들림 이대로 멈춰도 좋을 고요

유리병에 갇혀 흘러가는 물빛으로 영원히

 

그는 마흔

나는 스물

 

마흔의 발목은 물빛으로 다녀가는지

구부정해진 가로수의 어깨 구부러지지 않으려 뼈를 세우는 가로등

물빛이 삼킨 대칭의 근육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 바라본다 비릿한 냄새라도 잡고 싶어 한 발짝 다가가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 반은 삼키고 반만 내어주는 셈법으로 여기요 부르면 하나로 묶이는 분절음 아득한 바닥 아득한 수평 아득해지는 마흔의 목소리

 

자꾸만 흘러간다 흘러가서 아름다울 미래 물빛에 물빛을 더하는 유배의 시간 당신의 질감을 보여줘요 퍼내고 또 퍼내도 벗겨지지 않는 물의 껍질 잡히지 않는 물의 반짝임

 

우두커니 서서 가능한 자세를 생각한다 내 눈에 고인 그의 눈물

정류장의 의자가 흔들린다 모서리가 지워진다

 

  

  —《포지션》2016년 봄호 



                      


 그때

                                   이우성





그때 벽은 상자 같았어

나는 상자 주위를 서성이다 의자에 앉았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어

상자를 열고 그림을 집어넣었어 그곳에서 그림이 완성되기를 바라며

우리가 늙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들이 와서 물었어

무엇을 그렸어요

누가 그걸 알겠어 나도 그림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는데

 

재킷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이렇게 적었어

상자 안에 그림

 

그리고 나는 죽었어 아마도

모두가 죽듯이 그렇게

 

나를 묻을 때 노트도 같이 묻었을까

노트는 자라서 나무 모양대로 변했을까 할 말이 많은 노인처럼

물보다 꾸준한 건 시간뿐이지

 

사람들은 벽 속에 그림이 있다는 걸 잊었어 당연히 상자도 잊었지

 

나는 다시 태어나서 벽의 소리를 들어

똑똑

나는 왜 두드릴까

상자 안에서 누군가 나올 거라고

그 안에 계단이 있고

모든 지나간 것들이 거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니까 그때는 영원히 여기에는 없다고

생각하며 죽은 걸까

 

                     —《현대시》2016년 7월호






비밀의 방

 

                                         조 원



 

사각의 벽이 없다면 우리는

벌써 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원시의 동굴에서는 아버지와 딸,

누이와 동생

어머니와 삼촌이 알몸을 껴안고

개처럼 잠들었을지도 몰라

 

다행히 누군가 모서리를 세우고

벽지를 두르고 커튼을 쳐서

우리의 사생활은 보호받게 되었다

 

벽은 짐승과 인간을 구분 짓는 경계선

우리는 검은 털옷을 벗고

사각지대를 달려가는 종족

 

야성의 시간을 포효하며

개가 되지 않고 개처럼 뒹굴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이곳은 외부인이 없으므로

서로가 절실한 내부인

 

황홀경에 빠진 별 하나 만나기 위해

핥고, 할퀴고, 물어뜯고, 비비며

고독한 음부를 헤엄쳐 간다.

 

절벽 끝에 서서 털을 말리는 늑대여

탄성만 지르던 모음의 귀두여

아무 일 없다는 듯 우리는

곧 자음을 엮어 명확하게 발음할 것이다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가 회의록을 작성하고

내일의 물량을 점검할 것이다

 

벽 안에서 벌인 모든 접촉은

야성의 사랑이 나누었던 내밀한 각도

이것이 개와 개인의 차이 

 

—《시와 사상》 2016년 여름호  

 

                    






마그덴부르크의 저녁

                                   김승일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양팔 벌린다. 일제히

드넓어지는

손끝과 손끝 사이

불고 있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훈화 말씀이

길어지고 길어지고

새카만 머리를 한 하굣길 학생들이 대로를 빠져나간다. 수백 명의

쥐어띁겨 빠진 머리칼처럼

저들도 한 올 한 올

혼자 다니기 시작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각자의 정수리 위로

말씀이 떨어지고 양팔 벌리는 바람과 바람

낙엽이 움직이고

구름은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고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낙엽과

아직도 확연하게 날아가고 있는 구름을 향하여

새들이 날아가 처박히는 거기

머리칼 사이로 새고 있는 것

머리킬 사이로 새고 있는 것

설렘을 간직하고 있는

뜩운 물속에 섞이는 차가운 물처럼

한쪽 반구에서 다른 반구로 흘러가는 구름들

아무도 이름 부르지 않아서 내 이름이

선명해지는 초저녁 바람

이제 무엇을 쓸고 다니는 것일까

마그덴브르크의 저녁이 온다

수십 마리의 말들이 진공의 반구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오래된, 어느 날의 이국 풍경

펑 소리를 내며 어제와 오늘이, (하루하루가) 우스꽝스럽게 갈라진다면

눈물이 날까

머리에서 추락한

혼자가 또다시 혼자가 되는

낙엽과 구름

나의 괄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태동하는 모든 바람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본다

다리도 내밀어 본다.

누가 나를 쥐어뜯는 것 같은데

아무도 없다


-김승일, 『프로메데우스』, (2016, 파란)






눈물 형이상학의 서(序) 

 

                                     오주리

 

 

정원이 보이는 서재에 눈물이 떠 있다

 

진초록의 동그란 비애들

 

희랍어 어근의, 영생의 잎들 

 

열매의 알 속에 우주가 있다

 

액체의 막에 둘러싸인 미미(微微)한, 불멸의 존재들

 

덩굴이 빛의 입자로 떠돌며 비어(秘語)로 우주의 교향곡을 일깨운다

 

신의 계단으로써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책들을 쌓는다

 

나의 책은 문자의 고름을 서광 아래 날리고 백지로 다시 태어난다

 

눈물이란 잉크로 존재를 위한 형이상학의 서를 쓴다

 

 

  —《시와 정신》2016년 여름호

                       

          


            


백야

                         남길순    

 




나와 같은 몸을 쓰는

또 다른 나와 마주칠 때가 있다

 

호텔에 누워 듣는 개 짖는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멀다

 

밤이 왔으나 죽지 못하는 태양

 

낮 동안

카프카의 무덤을 찾느라 묘지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카프카를 만났다

검은 묘비들이 살아 돌아오는 밤

 

클라이맥스로 짖어대다가 일순간

고요해지는 하늘을 본다

 

유대인 묘지 끄트머리쯤에

내가 찾는 카프카는 누워 있었다

그를 찾아야만 하는 간절한 이유라도 있는 듯

각혈하는 장미 한 송이 놓고

돌아설 때

 

한동안 잠잠하던 병이 도진다

 

이 불안의 시작이 어디인지

여름밤은 스핑크스처럼 창문 앞을 지키며

돌아가지 않는다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소리는

밤새 끙끙거리고

곁에 누워있던 누군가 황망히 떠나간 것처럼

몸을 웅크리며 너는

이불을 둘둘 말고 있다

 

지구의 한 귀퉁이

주소를 모르는 이곳에서

 

   —《현대시학》2016년 3월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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