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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5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작] 장정욱 김재윤

문근영 2018. 10. 23. 03:49

[2015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작] 장정욱 김재윤

 

열두 개의 밤이 지나고 있다 외 4/ 장정욱

 

 

급하게 달려온 밤

옷도 벗지 못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전부를 보이는 것은 규율을 어기는 것

 

오늘은 열두 개의 기차가 지나갈지 몰라

칸칸마다 다른 농도를 갖고 있지

 

목까지 여민 함박눈

목까지 내민 장밋빛 바람

 

열두 개의 잠속에선 당신의 그림자가 비밀스럽게 자라나지

끊을 수 없는 중독

아끼지 않는 거짓말

 

네 잠에 숨어들면 누구도 찾을 수 없지

 

끌려 다니는 잠과 일어나려는 잠 사이

나비 한 마리 날개를 접지

 

 

 

얼음 수화기

 

 

살얼음 밑으로 들려오는 전화 벨소리

밤이 얇게 얼어가고 있다

잠깐 잠깐 소리를 죽인 채

너를 부른다, 여보세요

언 물결 위로

빙점을 오가는 너와 나의 숨소리

수화기는 차갑고

목소리는 물방울 튀듯

전파의 흐름을 벗어난다

얼어붙은 수화기에 갇힌 채

들려오지 않는 말들

꼬인 전화선으로

깨진 물결의 파장이 흐른다

점점 두꺼워지는 침묵의 결

눌러진 버튼마다

언 지문만 하얗게 남아있다

언제쯤 저 수화기가 녹을 수 있을까

냉기가 감도는 사이 목소리는

얼음 속 물고기처럼 눈을 감았다

 

 

 

달의 옆모습

 

 

달빛이 서서히 눈을 뜨는 어둠 앞

내일이 없는 서로의 하루를 어떤 방식으로 보내줄까

 

밤의 표정은 풀린 단추처럼 헐겁다

너의 옆모습이 어두웠다 잠깐 환해진다

 

각자의 습관으로 말하는 우리들

뚝뚝 부러지는 성냥개비 같은 언어가 켜졌다가는 금세 꺼져버리는

 

버들의 발목이 천변 물결에 들어있다

발목이 담긴 쪽은 푸르게

다른 한쪽은 검게 흐른다

 

너의 환한 얼굴 건너편이 궁금하다

나와 달의 거리만큼 먼 저쪽의 시선

 

반쪽의 빛으로는 물결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다

앞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달빛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귀

우리는 그림자만 안고 각자의 밤으로 돌아갔다

 

 

 

비상구

 

 

당신이 구름을 묻어 놓고 간 계단에

칸칸이 새겨진 유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건널 수 없는 어제와 오늘의 관계

죽은 글자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계단 위 화초들은 저마다 목을 꺽은 채

마른 향기를 풍긴다

풍선처럼 부풀어 아프지 않은 발목

뚜벅뚜벅 소리를 잃은 지팡이

무릎을 세운 직각의 시선이

한 걸음을 읽어내지 못한다

어젯밤 불어온 흙먼지 사이로

묘지의 냄새가 터벅터벅 올라온다

당신이 그려 놓고 간 괄호 속

부르지 못할 어둠만 가득 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연락되지 않는 어제와 오늘

이리저리 흩어진 뼛가루 같은 말들

한 칸의 먼지 되어

먼 훗날을 풀석거린다

지나온 계단 밑으로

당신의 호흡이 흘러내린다

당신의 그림자는 한 칸씩 사라지고

나는 또 계단을 한 칸씩 쌓아 올린다

 

 

 

꽃은 잠이 들었네

 

 

당신의 숨은 봄의 씨앗처럼 날아왔다

 

습기에 싸인 과거와 지워질 바람 같은 맥박이

오후의 정맥을 타고 느리게 지나간다

 

공장은 아침마다 딱딱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말이 착했던 남자는 302호로

귀가 착했던 여자는 402호로

한 조가 되는 저편에 혼자서 당신은 진열된다

 

두 개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

한 번 열렸다 아주 닫혀버리는 문이 있다

 

안과 밖이 연결되기 전에

당신의 어두웠던 두 귀에 한 줌의 햇살을 흘려 넣는다

 

환한 고요가 울음을 끌고 간다

 

바람이 불자

당신이 지나간 봄의 통로에 흰나비 떼가 아득히 날린다

 

 

 

장정욱

인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가만히 있다 외 4/ 김재윤

 

 

쓰던 말과 말투가 기억나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게 뭐가 문제라고, 가만히 있는 것을 상담 받고 가만히 있는 것을 위로 받는다

 

가만히 있었더니 높이 뛰어오르는 자세가 사라지고 연락이 두절 되고 먹는 일이 잊혀졌다 가만히 있는 것에 브레이크를 채우니 다른 것들이 빨라지고 높아지고 스쳐갔다

 

어느 날은 어느 날의 이치에 맞는 말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지만 가만히 있을 뿐인데 묵은 말들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질주가 없는데 이젠 제발 그만 하라고 한다

 

가만히 있어보니 이것만한 천직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러니 제발 나가죽기라도 하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극단적인 부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또 있겠는가

 

가만히 있는 날들이 너무 많아졌다

베란다 구석 저 양파도 봄이 오면 싹이 돋겠지

나가지 않기 위해 방문이 되어야겠다

 

 

 

음보(音步)

 

 

기러기들이 날아간다

제 음자리표 찍으며 간다

저것은 북쪽으로 가는 레일

탈선하지 않으려 내는 음족音足이다

 

아슬아슬 줄타기 하던, 아버지

휘청거리는 것은

수 백 마리 기러기가

몸속에 깃을 치는 것

한 생이

저렇게 몇 줄로 요약 된다

 

가는 곳은 모두 기항지

매순간 연착을 반복하다

모든 계절을 지나쳐 왔다

 

이런 길잡이 처음이라는 듯

음족으로 따르는 가족을 이끌고

겨울 산을 오른다

 

그곳은

따뜻한 곳이다

곳일 것이다

   

 

 

노지

 

 

수 십 년 차고 있던 전대마냥

아랫배에 울음주머니를 차고 있는 엄마

노점단속반 기미 같은 것은 금방 알아챘다

울면서도 이문을 생각하는지

검은 봉투 같이 부스럭거린다

셈에 관해서는 저 울음을 당할 수 없다

노점에서 팔았던 각양각색만큼이나 다채로운 울음이야말로

겨울 냉이 한 무더기 같다

하우스에서 나온 것을

노지라고 속여 팔던

그 한 무더기의 파릇함

스프레이 칙칙 뿌리던 상술이 훌쩍인다

딱딱한 의자에서 옹이를 다져온 눈치 빠른 울음,

그러면 남는 것 없다는 듯

슬쩍 얹어주는 눈물의 끝자락이

서둘러 전대 속으로 들어간다

 

결국 너도 전대에서 나왔다고, 그래서 나는 늘 노지인가

평생을 믿어 온 얄팍한 상술 끝자락에서

엄마의 봄날이 돋아난다는 것도 알지만

생업이 몰락했음을 엄마만 모르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손님인가

나는 당신의 몇 번째 봄인가 

 

 

 

 

 

밑줄

 

 

늙은 소가 종일 한 일은

빈 밭에 나가

느릿한 밑줄을 친 일밖엔 없다

 

돌아와서는 커다랗고 둥근 돌의 구멍에 묶여

봄볕이나 되새김질하고 있다

구멍 뚫린 저 돌은

마침표 같다

 

마침표는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는 기호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돌의 눈 같은 구멍에 묶여 있는 소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눈들은

다 마침표라는 생각이 든다

검은 허방이다

 

소가 돌에 묶여 있다

아니, 둥글고 투명한 허방에 묶여 있다

수직의 밑줄을 그으며

새순들이 뻗어나가는 저기 저 허공

포르르 새가 날아간다

작고 여린 마침표 같다

 

 

   

슴베*

 

 

아버지 돌아가신 그 집

가장으로 서 있던 먹감나무 쓰러졌다

한 집안에서 가장이 빠지고 난 뒤부턴

낫자루며 농기구 자루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떫은맛과 단맛을 알게 했던 먹감나무뿌리는

오래 흔들린 듯 갈래가 어지럽다

가지와 뿌리 어느 쪽이 슴베였는지는 모르지만

뾰족한 그 끝을 보면

박힐 때 수월하기 보다는

빠질 때 쉬우라는 말 같다

그렇게 양쪽이 물려있는 동안

손잡이와 날이 함께 커졌다

 

한 쪽이 두절 됐다고 해서 두절이 아닌 것처럼

손잡이와 날은 아버지, 어머니 하는 말 같다

 

빠진 낫자루 안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들어있다

나무가 서 있던 자리를 올려다보면

반짝반짝 별들이 지나가고 있다

나무를 잘라 토막은 실어 보내고 잎사귀를 긁어 태운다

젖은 연기가 하늘 자리에 박히고 있었다

뒤쳐진 연기들은 끝이 뾰족해서 눈이 따갑다

 

나무들은 하늘에

슴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울창한 숲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유독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다

먹감나무 쓰러질 때 우지끈 하는 소리는

하늘 한 귀퉁이가 쑥 빠지는 소리였다

 

*'슴배'2014년 마로니에 여성백일장 대상 수상 작품

 

   

김재윤 본명 김수화

충북 괴산 출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졸업.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이순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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