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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3년 여름호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작품 주걱 외 4편/ 박은형

문근영 2018. 9. 11. 02:46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작품 박은형

 

주걱 외 4편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

그 집은 가득 비어 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

삐걱, 지장을 놓으며

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

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

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

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

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

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

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

고봉밥 한 그릇

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몸피를 그득 불린 채 잰 걸음으로 황사가 왔다

뻑뻑한 입자가 갯벌같이 허공을 메우던 그날

신호를 기다리는 1톤 트럭 운전석에서

흡사 행려 같은 왼손 하나,

황사의 중심부로 떨려 나왔다

전선용 테이프가 친친 감은 새끼손가락과

접합 자국 선연한 검지의 그 손은

마치 내가 어제 믿었던 종교처럼 천연덕스럽다

누구에겐들 미리 살아본 생을 물을 수 있을까 마는

인생하류를 관장하는 제사장 있어

밉보인 그 손을 은박지처럼 확 구긴 건 아닐까

내 억측의 신호가 푸른 불로 바뀔 때

생을 받아 적어 온 그 손이 퍼뜩 글썽이는 듯도 하였다

낡은 빨래집게인양 휜 검지와 중지사이에

담배 한 개비 느슨히 끼운 그 손은

삐뚜름한 생을 저어가는, 한 척의 지느러미

 

꾸덕한 그 손 안에도

누군가를 쓰다듬을 때면

난로처럼 따뜻해지는 손바닥이 생길 것이다

 

 

앵두의 폐사지

 

구불구불 꽃 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게 되었네

백년도 어쩌면 천년도 더 흙잠을 잤을 절간의 흔적

한 시절의 영화는 기단석 돌꽃으로나 다시 살고 있었지

꼬리를 찰싹 올려붙인 쌍사자, 아직 석등의 연화대를 떠받치고

날마다 무연히 들렀을 오후 다섯 시 무렵의 희붐한 고요가

무릎걸음으로 몇 걸음씩, 하루치 빛을 아끼며 저녁으로 번져가네

오월의 옛집 같은 그 저녁의 팔꿈치 안에는

아직 다 울지 못한 울음 하나 물앵두나무로 접혀서

오래 욱여둔 몸의 소용돌이를 마저 떨궈 내고 있었네

그것은 꽃을 다 피운 뒤에 젖은 신을 끌며 돌아오던 마음 같은 것

그것은 기침처럼 붉게 웅크리다 뛰어내린 이별 같은 것

뒤꼍 사금파리처럼 혼자 놀던 별 하나가

폐사지의 발치께로 가장 밝은 빛 하나를 보내는 지금

반지를 끼던 손가락같이 가지런히 엎드린 저녁이 오고 있네

달콤한 폐허의 귀 하나 선물 받는 듯이

꽃 뭉텅뭉텅 져버리고 싶은 그런 저녁이 오네

 

 

골목도둑

 

내가 훔치고 싶은 것들의 목록에는 오래된 골목의 민낯도 들어있다

오늘도 해질 무렵에 구부정한 골목 하나를 지나왔다

 

낮 열두시의 광활하고 뜨거운 직각을 빠져나온 골목은

슴슴하고 다정한 것들로 오목하다

 

기억과 희망이 무뚝뚝하게 섞인 소나기 같은 골목으로

이마를 맞댄 지붕 밑 아침을 떠난 이들이 돌아온다

 

골목을 내고 다시 그 골목을 끼고 살아가는 삶이란

물방울을 오려 내는 토란잎같이 넓적하고 사소한 것이어서

문간에 놓인 안짱다리 의자의 딸꾹질 소리에 귀를 잡혀가고

문 안쪽 낮은 세간들의 복사뼈에 슨 바람의 유목에도 한눈을 준다

앉은뱅이책상 속 꽃씨같이 수줍은 여름 뒤란은

담장에 발끝 올린 치자꽃의 흰 도벽이 점점이 섞이는 시간

 

귀 떨어진 석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킁킁대다

몰래 석류나무에 꽃을 매다는 저녁들이 골목에 즐비하다

골목을 지나 와서 골목에 모였다 골목으로 흩어지는 빛의 강

 

장석처럼 구부러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는 골목이 여럿 들어있다

갖가지 삶의 언질들이 묵은 시래기처럼 부시럭대는 골목

내가 훔치러 갈 어느 미래에는 지도에서 아주 사라질지도 모르는

저 골목이란 이름을, 나는 오늘도 경건하게 지난다

 

너무 어둡거나 환해서는 뵈지 않는 것들,

꽃향유로 패고 있다

 

 

문을 닫는 사람

 

마치 목도리처럼 붉은 흙담이 한 칸 거처를 두르고 있다

단단하던 시간의 점막이 뭉개져 자꾸 낮아지는 이곳은

이정표를 놓치고 아무렇게나 꺾어 든 산길의 끝에 있다

 

그 끝, 마을 모퉁이에 문을 고쳐 닫는 이가 있다

흙담에 잇댄 대나무 성근 사립으로 일몰 한 장 떨어져 낀다

석양의 무게 탓인지 힘겹게 아귀를 맞추어도

그저 담장에 비스듬히 기댈 뿐 문은 똑바로 서지 않는다

내생(來生)의 주문처럼 오래 경계목을 고쳐 세우는 이의 등에는

사립문과 지면의 직각보다 잘 꺾인 반듯한 몸의 각이 얹혀 있다

 

마당을 건너가는 굽은 뒤축에서

눅눅해진 무심의 모퉁이가 느릿하게 헐리고

기억의 집에 살던 새떼들이 몸의 시간을 파 먹는다

작고 더디고 꺼칠하게 뭉친 생은 풀기 없는 무음으로 단단하다

 

한줌 허술한 뒤태를 비껴 저녁끼니 때 지나간다

세상과 겹쳐 있는, 모든 한 사람인 이가

스스로 닫아야 할 문이 되어 간다

 

오른쪽이나 왼쪽, 그 산그늘마저 고요한 길 끝에서

오래 문을 닫는, 닫히는 문이 된 이를 본다

아무도 들어가 물을 수 없는 그 문 밖에서 통속처럼

사과꽃이 지고 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애지문학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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