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지의 균형감각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집현전 직제학이던 양성지(梁誠之)가 세조에게 시무책을 올렸다. 새로운 국왕에게 기본적인 정책 방향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는데, 총 12개의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성지가 제안한 내용 중에서 ‘예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조목은 기왕에 많이 알려졌는데, 조선은 기후와 풍토가 중국과 다른 데다 단군 이후 별도의 세계를 이루어 왔으므로, 조복(朝服)과 같은 일부 제도를 제외하고는 종래의 의복 제도와 풍속을 유지해 나가자는 내용이다. 양성지는 특히 의복이나 언어가 중국과 같다면 민심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고, 고려 말기에 불만을 품었던 세력들이 대거 몽고로 투항했던 사태와 같은 일이 다시 생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양성지의 이 발언은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하던 역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한국사 개설서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예법은 본국의 풍습을 따라야
그런데 양성지가 제안한 시무책들을 살펴보면, 그는 자신 내지는 자국(自國)을 사고의 중심에 두면서도 타자의 장점을 살피는 균형감각을 가졌음이 잘 나타난다. 가령 그는 고려시대를 평가하면서 초기에는 토지제도와 군사제도가 정비되었지만, 후대에는 대부분의 토지가 사전(私田)이 되고 군사는 사병(私兵)이 되어 몽고와 왜구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려 태조의 백성 구제와 성종의 제도 정비, 현종의 정치, 문종의 백성 안정책은 모범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고, 의종이 시와 술을 좋아한 것, 충렬왕이 사냥을 좋아한 것, 충혜왕이 놀이를 즐긴 것,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것은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성지는 국제관계에 있어 명(明)에 대한 사대(事大)의 예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제안했다. 그는 조선의 지리적 위치가 천연의 요새지이기 때문에 수(隋)나 당(唐)처럼 강성한 국가들도 굴복시키지 못했고, 요(遼)는 이웃나라에 대한 예로, 금(金)은 부모의 나라로, 송(宋)은 빈례(賓禮)로 대했는데, 유일하게 원(元)과는 수십 년 전쟁을 거친 후 신하로 복속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명이 건국된 직후에는 양국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가 근래에 들어와 회복되었는데,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극진히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양성지는 명나라에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사신은 성의를 다하지만 비정기적인 사신의 파견을 엄격히 제한하여, 백성들의 삶을 편안히 하고 명과의 우호 관계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중국과의 관계, 무반의 대우에
양성지는 문반과 무반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반은 세력을 가지고 있고 핵심 요직을 차지한 반면에 무반은 몹시 힘든 일을 하면서도 권세는 없는 법인데, 만일 국왕이 문신을 편파적으로 우대한다면 고려 시대 무신의 난과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의정부와 승정원, 심지어는 대간까지도 문신과 무신을 교체해 가면서 임명하도록 했고, 나중에는 국가에서 모범이 되는 학자들을 문묘(文廟)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듯이 무공이 출중한 장수들을 모신 무성묘(武成廟)를 건설하자고까지 제안했다. 고려 시대의 정치를 거울로 삼아 문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책을 펴자는 주장이었다.
세조는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에 조카인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국왕이 되었고, 양성지는 7월 5일에 이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유행하던 유교식 명분으로 판단하자면 세조의 집권과정에는 하자가 많았는데, 이렇듯 미묘한 시기에 양성지는 시무책을 올려 새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양성지의 시무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그의 절묘한 타이밍과 균형감각에 눈이 간다. 국왕이 되어 어떤 정치를 펼쳐야 할지를 고민하던 세조에게 그는 시의적절한 실천 방안들을 제시했고, 고려 정치의 장점과 단점, 조선과 중국의 국제 관계, 문반과 무반의 대우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관되게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양성지가 세조에게 발탁되어 핵심 관료로 활동했음은 물론이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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