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다산이 잘 나가던 시절 / 박석무

문근영 2018. 7. 11. 00:13



 

547

 

다산이 잘 나가던 시절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다산 정약용, 18년의 긴긴 유배살이의 아프고 애처로운 시절만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다산에게도 한 때는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을묘년(1795) 봄은 우리 정조대왕께서 왕위에 오른 19년째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납시어 뭇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으실 때에 매우 노하여 큰 소리로 말하시기를 ‘조정에 있는 온 관료들은 나의 고명을 들으라. 내가 오늘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등용하여 황천과 조종의 명령을 받들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뜻을 분명히 밝혀서 백성의 뜻을 크게 안정시키려 하노라’”라고 다산은 기록했습니다. (李家煥墓誌銘)

그렇게 서두를 열고, “이때 임금은 채제공을 기용하여 좌의정에 제수하고 동부승지이던 신 약용에게 앞으로 나와 뽑게 하여 앞전의 대사성(大司成) 신 이가환을 발탁하여 공조판서에 제수하시니 온 나라가 흡족해 하며 ‘선류(善類)가 조정에 모였다’고 하였다.”(같은 글) 채제공이 좌의정, 이가환이 공조판서, 정약용이 동부승지, 군자들이자 선류(善類)들이 조정에 모여 이제 본격적인 정조대왕의 치세가 열리고 있었다는 다산의 주장입니다.

이 때는 그렇게 갈망하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의 화성으로 옮기고 화성까지 쌓아 마무리작업을 하던 때입니다. 화성을 완전무결하게 정비하고 모든 격식을 정리하여 마무리하려는 뜻에서, “가환아, 그대는 박식하니 이 일을 잘 맡아라. 약용아, 그대는 민첩하니 가환을 도와 일을 처리하라. 규영부는 왕의 거처와 가까워 매우 엄숙한 곳이니, 그대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놀고 쉬면서 연구하라. 그대들에게 궁중의 술과 진귀한 반찬과 국과, 귤·등자(橙子)와 말린 고기와 엿을 내릴 것이니, 마시고 먹으며 후한 은혜에 젖으라.”

정조라는 희대의 학자 군주, 채제공이라는 뛰어난 재상, 이가환·정약용 등의 탁월한 신하들이 합작하여 조선 최고의 학문과 문화가 꽃피던 시절에, 다산은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학문과 재능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잘 나가던 시절이었고, 그 임금에 그 신하이던 멋진 치세였습니다. 학문이 높고 능력이 뛰어난 관료를 알아보고 우대할 줄 알았던 정조의 안목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치란 통치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보필하는 관료의 우수성은 더욱 중요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경제가 뒤흔들리는 요즘, 학자 통치자에 학자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의논하는 모습이 그립기만 합니다.

박석무 드림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목록보기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