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탄생 (외 2편)
이덕규
주로 식물에 기생한다 입이 없고
항문이 없고 내장이 없고 생식이 없어
먹이사슬의 가장 끝자리에 있으나 이제는
거의 포식자가 없어 간신히 동물이다
태어나 일생 온몸으로 한곳을 응시하거나
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짧은 수명에
육체를 다 소진하고 가서 흔적이 없고
남긴 말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일설에,
허공을 떠도는 맹수 중에
가장 추하고 험악한 짐승이 일 년 중
마음이 맑아지는 절기의 한 날을 가려
낳는다고 한다 사선을 넘나드는
난산의 깊은 산통 끝에
온통 캄캄해진 몸으로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을 낳는다고 한다
끙게질
큰 황소가 한겨울 먹고 놀면 사람이 생쥐만하게 보인다는데요 무엇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꾹, 밟고 싶어진다는데요 아—흐, 몸이 근지러워
말뚝에 치대고 들이받고 비비는 놈을 바로 논밭으로 밀어 넣으면 씨근덕 불끈덕
삐뚤빼뚤 갈지자로 갈아대기 일쑤인데요
이른봄 아버지는 통나무 썰매 위에 일 마력짜리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올리고
먼지 뽀얗게 날리며 들판 몇 바퀴 뺑뺑이를 돌리는데요 이른바 끙게질이라고 하는데요
맷돌 같은 어금니를 뿌드득 뿌득 갈아대며 메기수염 같은 끈끈한 침을 흘리며 등짝엔 시루떡을 쪄 얹은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데요
반나절쯤 돌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라, 발굽 아래 설설 기던 사람들이 저보다 더 크게 보여서 눈망울이 화등잔만해진다는데요
거짓말처럼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 하는데요
쟁기질 써레질로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이면 또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데요
서리태 듬뿍 넣은 여물 한 구유 정신없이 먹고 고개를 들면 그 크다란 눈동자 속에
모종하고 비 맞은 수숫대처럼 웃자란 어린 주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요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 이마에도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이었는데요
설파(說破)하는 뱀
아무리 더러운 곳을 통과해도
먼지 한 톨 묻지 않는 그는 죽기 전에 절대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는 법이 없다지
추운 산 어두운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잘 때에도 몸을 둥글게 말아 똬리 튼 중앙에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장좌불와, 면벽좌선한다지
머릿속에 고인 오직 맑은 한 방울의 치명적인 깨달음만이 한겨울 유일한 식량이라지
저것 봐,
동안거 끝내고 탁발 나온
어느 야윈 선승이 들길 한가운데 가부좌 틀고 앉아 일갈(一喝)하는
저 날카로운 설파(說破)!
—마침내 말로서 바위를 꾸짖어 산산조각 내겠다는 것이지
—시집『놈이었습니다』(2015)
--------------
이덕규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밥그릇 경전』『놈이었습니다』.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덕룡 시집 『하멜서신』- 풋잠에 들다 외 2편 (0) | 2018.03.17 |
---|---|
[스크랩] 송찬호 시집 『분홍나막신』- 분홍 나막신 외 2편 (0) | 2018.03.17 |
[스크랩] 박형권 시집 『우두커니』- 우두커니 외 2편 (0) | 2018.03.17 |
[스크랩]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고귀한 유산 외 2편 (0) | 2018.03.17 |
[스크랩] 고영민 시집 『사슴 공원에서』- 극치 외 2편 (0) | 2018.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