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유산 (외 2편)
송경동
내가 죽어서라도 세상이 바뀌면 좋겠다며
내어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노동자들이 목숨을 놓을 때마다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보수언론들이 이야기한다
천상 호수 티티카카 호까지 가는 페루의 고산 열차는
1870년 착공해 삼십팔 년이 걸렸다
공사 기간 중 이천 명 넘는 인부들이 죽었다
중간 역도 없이 만년설 속을 열세 시간 달리는데
딱 한번 이십 분간 정차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이천 명의 상여를 타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사회가 우리의 삶을 이용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죽음을 특별히 애도할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 내릴 수 있는
생의 정거장은 의외로 많지 않다
시인과 죄수
천상병시문학상을 받는 날
오전엔 또 벌 받을 일 있어
서울중앙법원 재판정에 서 있었다
한편에서는 정의인 게
한편에서는 불법, 다행히
벌금 삼백만원에 상금 오백만원
정의가 일부 승소했다
신동엽문학상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오후엔
드디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벅찬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 받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 종일 부끄러운데
벌 받는 자리는 혼자여도
한없이 뿌듯하고 떳떳해지니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결핵보다 더 무서운 병
종로2가 공구상가 골목 안
여인숙 건물 지하 목욕탕을 개조해 쓰던
일용잡부 소개소에서 날일 다니며
한 달 십만 원짜리 달방을 얻어 썼지
같은 방 친구의 부업은 타짜
한 번에 오만원 이상은 따지 말 것
한 달에 보름은 일을 다녀야 의심받지 않음
한 곳에 석 달 넘게 머물지 말 것
원칙 있던 그가 가끔 사주는
오천 원짜리 반계탕이 참 맛있었지
밤새워 때 전 이불 속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내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꼭 성공하라고
떠나는 날에야
자신이 결핵 환자라 고백했지
그가 떠난 날 처음으로
축축하고 무거운 이불을
햇볕 쬐는 여인숙 옥상 빨랫줄에 널었지
내게는
결핵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이라는 병이 있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으니, 쌤쌤
괜찮다고 괜찮다고
어디에 가든 들키지 말고
잘 지내라고 빌어주었어
—시집『나는 한국인이 아니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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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1967년 전남 벌교 출생.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꿀잠』『사소한 물음들에 답함』『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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