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익명匿名 / 이만섭

문근영 2018. 3. 17. 09:52

익명匿名

 

   이만섭

 

 

 

 

지하도 입구에서 그가 성직자처럼

정중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고

수수한 선물을 건네듯 나는 악수를 했다

전단이 놓인 손이어서 부담 없이 받아들였는데

익명이 다녀간 사실을 알았다

그도 처지가 다르지 않을 테지만

행위만 남고 비워지는 부재의 감정은

지하철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과

눈빛으로만 오간 경우에도 예외 없이

순간순간 생각을 지우는 데 쓰인 것이다

얼굴이 얼굴을 대해도 얼굴이 필요치 않듯이

그런 주체가 사라지는 관계란

마음이 몸을 부릴 때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같아

가장 분명하게 감정을 가르는 경계에

형식이라는 명분을 남긴다

어느 날 저수지가 물에 사람을 숨겨놓고

익명을 당부할 때 세상은

애도보다 소문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름 석 자에도 흉금이란 장막이 있어

그걸 걷어내는 것도 가슴의 일이다

 

 

 

                      —《시와 표현》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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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 1954년 전북 고창 출생. 2010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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