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민 환(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한겨레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이 신문이 출범할 때 90일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4.19 이후에 나온 <민족일보>가 90여 일만에 군사정변을 만나 폐간된 바 있는데 <한겨레신문>은 강제폐간이야 면하겠지만 경영난으로 금방 주저앉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은 석 달이 아니라 20년의 두터운 연륜을 쌓았다.
<한겨레신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전에는 언론이 권력과 담합하여 정보를 은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의제(agenda)도 한정되고 토론도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이 등장하여 공론형성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상황은 많이 개선되었다. 우리 공론장에 소외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매체가 등장함으로써 민주적 공론장의 최소한의 요건은 갖추게 된 셈이다.
어려운 앞길, 정론 고급지냐? 진보적 대중지냐? 그러나 이 신문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다. 성년식을 치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런 말을 하면 부덕하다고 할지 모르나, 이 신문이 3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를 것이라고 자신 있게 전망할 수가 없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요인으로 신문 산업 전체가 당면한 위기를 꼽을 수 있다. 다 아는 바지만 신문의 수입원은 구독료와 광고료다. 독자는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 대가로 신문사에 구독료를 내고 광고주는 상품을 소비자에게 광고해준 대가로 신문사에 광고비를 치른다. 그러나 신문을 통해 사회정보나 상품정보를 얻는 독자나 소비자는 현저히 줄었다. 요즘 독자나 소비자는 전통적인 매체 대신에 다양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정보도 얻고 거래도 한다.
둘째 요인으로 <한겨레신문>의 대응능력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한겨레신문>은 저널리즘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합리적인 생존모델을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한 신문이 대중지로서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50만 부 정도의 독자는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의 독자 수는 이 수준에는 까마득하게 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독자 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신문>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3일 한국언론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서울대 강명구 교수는 <한겨레신문>이 진보적 고급지(高級紙)보다 정론적(正論的) 고급지를 지향할 것을 권고했다. 중도적인 지식인으로 독자층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언론재단의 유선영 박사는 강명구 교수의 제의를 보완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소수자의 관점과 중산층 독자의 생활에 기반을 둔 욕구를 조율함으로써 새로운 독자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성공회대학의 조희연 교수는 이들과는 견해를 달리했다. <한겨레신문>은 진보적 대중지로서 계급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겨레신문>은 정론 대중지로, <한겨레21>은 진보적 고급지로 이 세미나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겨레신문> 김형배 논설위원은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세미나를 내부 토론에 활용한다면 <한겨레신문>은 진보적 고급지로서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유연성을 발휘해 독자층을 확대해 가는 새로운 장정을 시작할 개연성이 있다. 관성의 법칙 때문에 <한겨레신문>의 모색은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그 정도의 변신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한겨레신문>이 독자 50만 명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아니 30만부 선이라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마 내부자들이 먼저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적 공중은 그 층이 그렇게 두텁지 못하다. 그렇다면 <한겨레신문>은 매체 전략을 차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신문>은 정론 대중지로 대중을 겨냥하고, 잡지인 <한겨레21>은 지향성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안이 그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독자 규모를 전제해야 새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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