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에 대한 다산의 연구는 참으로 깊고 넓었습니다. 『중용자잠(中庸自箴)』과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라는 연구서를 통해 의미가 깊고 어렵기 짝이 없는 중용의 논리를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됨이라야 그 성품을 다할 수 있다”(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라는 대목에서, “인간의 성품을 다할 수 있다면 만물의 성품도 다할 수 있다”(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 중용자잠)로 연결되는데, 여기서의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서 저 조선 중기이후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라는 희대의 성리철학 논쟁이 벌어져 학파와 문중별로 나뉘어 대단한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산은 그 혹독한 학설논쟁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인간의 삶이나 나라와 인민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논쟁의 중단을 외치며, 그 논리의 허구성을 참으로 명쾌하게 설파했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다한다(盡其性)는 제 몸을 닦아 지극한 선에 이름이요, 인간의 성품을 다한다(盡人性)는 남에게 봉사하며 지극한 선에 이른다 함이요, 만물의 성품을 다한다(盡物之性)는 위와 아래, 초목·조수(새나 짐승) 등 모든 것에 다 잘한다”라는 뜻이라 해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일마다 모두 지극히 진실하며(至眞至實),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며(可踐可履), 붙잡고 접촉할 수가 있으며(有摸有捉), 과장도 없고 허탄함도 없다(無誇無誕)”라는 실용과 실천의 세계가 가능해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논의되었다고, 단 한 차례라도 인물성동이의 학설이 더해지게 되면, 광막(廣漠)하고 허활(虛闊)하게 되어 머리를 넣고 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는 위대한 경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너무 넓고 너무 막막하며, 너무 헛되고 너무 비워서 손도 쓸 수 없는 관념의 유희로 빠지고 만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세상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인류의 삶이 제대로 향상되지 못하는 모든 이유가 바로 이런 경(經)의 잘못된 해석에 있다고 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실제적인 경의 해석을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인물성동성론은 불교의 이론이지 유교의 이론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실행·실천의 새로운 유교철학을 열어젖혔으니 바로 다산의 실학사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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