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과 놀다
이명
청량산 계곡은 도서관이다
푸른 이끼로 제본된 고서 한 권을 꺼내 읽는다
이끼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촘촘한 표지에서
전단향 냄새가 난다
바위를 제목으로 게송(偈頌)을 서문으로
첫 장부터 알 수 없음으로 시작되는 목차를 뒤적인다
풍자와 독설을 본문으로 동문서답하는
곧추선 발끝마다 번뜩이는 푸른 이끼들의 화려한 군무(群舞)
개나
소나
똥막대기나
뜰 앞의 잣나무나
문장은 짧고 단순하다
마음도 짐이 될 때 벗어던져라 이르시는
송고백칙(松古百則) 바위 속
묵직한 한 줄의 문장과 씨름하는 푸른 밤
몰두할수록
나는 가벼워진다
—시집『벽암과 놀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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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경북 안동 출생. 2011년 〈불교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분천동 본가입납』『벌레문법』『벽암과 놀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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