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벽암과 놀다 / 이 명

문근영 2018. 1. 2. 00:09

벽암과 놀다

 

  이명

 

 

   

청량산 계곡은 도서관이다

푸른 이끼로 제본된 고서 한 권을 꺼내 읽는다

이끼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촘촘한 표지에서

전단향 냄새가 난다

바위를 제목으로 게송(偈頌)을 서문으로

첫 장부터 알 수 없음으로 시작되는 목차를 뒤적인다

풍자와 독설을 본문으로 동문서답하는

곧추선 발끝마다 번뜩이는 푸른 이끼들의 화려한 군무(群舞)

개나

소나

똥막대기나

뜰 앞의 잣나무나

문장은 짧고 단순하다

마음도 짐이 될 때 벗어던져라 이르시는

송고백칙(松古百則) 바위 속

묵직한 한 줄의 문장과 씨름하는 푸른 밤

몰두할수록

나는 가벼워진다

 

 

 

                       —시집『벽암과 놀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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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경북 안동 출생. 2011년 〈불교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분천동 본가입납』『벌레문법』『벽암과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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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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