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트랙
—성근에게
박진성
나는 돌고 있어 파란 운동화를 신고 검은 트랙을 돌고 있어
이것은 운동일까 이것은 반복일까 열망과 멸망 사이,
이것은 기도일까 가까스로
나의 그림자를 견디며 나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이 맹목은
검은 봉지 속의 검은 공기 같은 것일까
우리는 자살한 가장의 시체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철탑 위의 추운 끼니를
폐지 줍는 노인의 굽은 등 위로 떨어지는 태양을 오갔지만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손가락이 아닐까
나는 돌고 있어 액정 속 채팅창 너머
야업(夜業)에서 돌고 있는 그대의 긴 하루와 같이 돌고 있어
아무리 더해도 가난한 초록과 오월의 고기압 사이를 걷고 있어
가까스로, 네가 좋아하는 말, 가까스로 그 말 위를 걸으면, 계속 걸으면
열병은 열망이 될 수 있을까
이 트랙에서 내릴 수 있을까 자정의 반복에서 내려갈 수 있을까
트랙을 돌고 있는 우리의 트랙은 도착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나는 우리라는 질병을 돌고 있어
—《무크 파란》창간호,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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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1년《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목숨』『아라리』『식물의 밤』, 산문집『청춘착란』.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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