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의 누각
김희숙
뇌수술을 한 친구의 문병
명징했던 한 인간의 누각樓閣이
고작 작은 실핏줄 한 가닥에 의지했었다니
어눌한 말투와 점령당한 뒤
남루한 표현들로 수습된다니
평생을 쌓은 높이가 한낱
어린아이가 뛰어 올라와 놀고 있는 높이라니.
가는 실핏줄을 오르고 있었던
불시不時를 살피지 못한 아둔함을 답습하고 있엇다는 것
끝자락까지 뛰어간 생의 전환점에서
아이가 된 친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겠지만
그것 또한 늙은 고아라는 것
병실 창밖엔 실핏줄 같은 빗줄기가
돌고 도는 뇌하수체인 듯 어지럽다.
이제 빗줄기 그치고 맑은 날 와서 나들이나 가자고
다독거리고 돌아선 길
요란한 빗소리가 어느새 잦아들고
또 고요해지고
나는 이 우기雨期의 누각을 접어
지팡이처럼 젖은 길을 짚고 있다.
때론 가장 높은 곳이
가장 남루해질 때가 있다.
펼친 순간엔 가장 높았던 곳이
접고 나면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
그 끝에 어디서 묻었을 오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네르바》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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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 2011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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