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진창의 누각 / 김희숙

문근영 2018. 1. 2. 00:05

진창의 누각

 

  김희숙

 

 

 

뇌수술을 한 친구의 문병

명징했던 한 인간의 누각樓閣

고작 작은 실핏줄 한 가닥에 의지했었다니

어눌한 말투와 점령당한 뒤

남루한 표현들로 수습된다니

평생을 쌓은 높이가 한낱

어린아이가 뛰어 올라와 놀고 있는 높이라니.

 

가는 실핏줄을 오르고 있었던

불시不時를 살피지 못한 아둔함을 답습하고 있엇다는 것

끝자락까지 뛰어간 생의 전환점에서

아이가 된 친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겠지만

그것 또한 늙은 고아라는 것

 

병실 창밖엔 실핏줄 같은 빗줄기가

돌고 도는 뇌하수체인 듯 어지럽다.

이제 빗줄기 그치고 맑은 날 와서 나들이나 가자고

다독거리고 돌아선 길

요란한 빗소리가 어느새 잦아들고

또 고요해지고

나는 이 우기雨期의 누각을 접어

지팡이처럼 젖은 길을 짚고 있다.

 

때론 가장 높은 곳이

가장 남루해질 때가 있다.

펼친 순간엔 가장 높았던 곳이

접고 나면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

그 끝에 어디서 묻었을 오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네르바》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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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 2011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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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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