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상자 시론(詩論)
함민복
종이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상자는 겸손하다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글씨가 내용이 되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지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깨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채운다
종이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詩)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창작과 비평》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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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우울氏의 一日』『자본주의의 약속』『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말랑말랑한 힘』『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등.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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