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세계문화유산(721)/ 콜롬비아/ 산타 크루스 데 몸포스 역사 지구

문근영 2017. 12. 29. 07:52

세계문화유산(721)/ 콜롬비아

 

산타 크루스 데 몸포스 역사 지구

(Historic Centre of Santa Cruz de Mompox; 1995)

 

 

View of Mompox from the Magdalena River

 

 

Chiesa di Santa Barbara

 

 

 

 

 

 

 

 

 

   1540년 마그달레나(Magdalena) 유역에 건설된 볼리바르 주[Bolivar Department]몸포스는 남아메리카 북부를 식민지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 도시는 강과 나란하게 개발되었으며, 중심가는 강의 제방으로서 기능했다. 역사 도시 중심부는 조화와 통일성을 가진 도시 경관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아직도 건립 당시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서 스페인 식민 도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잘 보여 주고 있다.

  산타 쿠르즈 데 몸포스 역사 지구는 강변에 세워진 스페인 주요 식민지 정착지의 전형이다. 이곳은 전략적상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현재까지 전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몸포스1540년에 카르타헤나(Cartagena) 총독인 후안 데 산타크루스(Juan de Santa Cruz)가 세웠으며,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산타 크루스 데 몸포스라고 했다. 이곳은 카르타헤나가 건립된 후 7년 만에 건립되었으며, 새로운 그라나다 왕국의 수도인 산타 페 데 보고타(Santa Fe de Bogota)가 건설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이 도시의 역사는 17세기에서 19세기 초 스페인 정복기에 식민지 침투와 점령 과정, 교통, 무역의 발달과 연계되어 있다. 내부 고원지대로 연결되는 주요 수로이면서 다른 주의 교통 수로인 카우카(Cauca) 강과 마그달레나 강이 합류하는 지점, 홍수를 피하기 위해 높이 쌓아올린 지대(해수면으로부터 33m 위쪽) 위에 구축되어 있으며, 카르타헤나에서 250m가량 떨어져 있다. 도시에는 행정관서의 역할을 하는 중앙 광장 대신에 교회와 이전의 인디언 정착촌에 대응하는 3개의 광장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이로써 몸포스는 카르타헤나 항구와 강이 흘러 들어가는 내륙 사이에 있는 교통로이면서 많은 육로들이 합류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혹독한 기후와 지리적인 위치로 어렵게 농업과 방목에 의한 목축업을 하던 이곳은 본래 도시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어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을 통치하는 지배 계층의 출현으로 몸포스는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지배 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농경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상대적으로 풍요로웠으며, 카르타헤나에서 몸포스로 오면서 호화로운 사치품을 향유하기 위해 공예가들과 장인들을 함께 데려왔다. 그들은 인디언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은 후, 그들을 지정된 영토에 몰아넣어 실제적으로 노예로 이용할 특권을 누리며 그들로부터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회도미니크회프란체스코회, 그리고 예수회 수사 등 성직자와 수사들이 또 다른 지배 계급을 형성했으며, 나중에는 이들이 지배 계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몸포스 시는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에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도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좁다란 일직선으로 세워진 정착지는 17세기 동안에 대로와 연결되어 좀 더 이차원적인 거리로 변모되고 다양한 외관을 갖추었다. 거리의 모습이 변화하면서 이곳은 본격적으로 도시의 짜임새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라 알바라다(La Albarada) 바로 뒤에 조성된 퇴적평야 때문에 더 이상 확장되기 어려웠다. 몸포스의 발전에 대해서는 18세기 중반의 역사학자 페드로 살세도 델 비야(Pedro Salzedo del Villas)에 의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저서 <아푼타미엔토스 이스토리알레스(Apuntamientos Historiales)>에는 도시 내에는 600채의 주택과 상점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벽돌 벽에 타일로 된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내부는 널찍하고 안락하며 견고했으며, 대체로 1~2층이었다. 널찍한 현관과 정원이 갖추어져 있었고, 1,800채 가까운 초가집과 작은 집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의 독립전쟁과 뒤이은 내전의 영향으로 인해 몸포스 시는 상류층 시민들이 죽거나 추방당하고, 전쟁 발발의 위협으로 농사를 그만두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감으로 도시와 인접 지역들은 사회적, 경제적 원동력을 잃게 되었다. 20세기 초까지는 여전히 항구 도시로 존속했지만, 지류에 퇴적물이 쌓이고 마그달레나 물길이 점차적으로 바뀌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정면에 자리 잡은 강과 여기에 인접한 빈 땅들이 분리되면서 하항(河港)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로 경제는 더욱 침체되었고 이러한 사회 상황은 관광 산업이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되는 20세기 후반의 마지막 10년까지 지속되었다. 몸포스의 도시 설계는 강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발달했다. 각 구역마다 교회가 있고, 이러한 교회들은 정착 초기에 요새의 역할을 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교회는 아마도 16세기 후반의 산타바바라(Santa Barbara) 교회일 것이다. 섬세한 건축 구조와 널찍한 내부 공간이 탑으로 보완되어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의 특징을 보인다. 17세기 이래로 알바라다(Albarada) 거리에는 소규모 가게 용도로 단층 주택들이 지어졌다. 이러한 주거용 상가빌딩들은 17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3~10단위로 열을 지어 건축되었다. 열을 지은 빌딩들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는 도시 경관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는 많은 건물들이 주거 용도에 맞게 개축되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도시 중앙과 측면의 공터에 건축된 사택(私宅)들은 그 지역 기후와 풍습에 맞게 조성되었다. 초기에는 상인들과 왕궁 하인들이 대개 중앙에 파티오(patio; 스페인식의 정원)가 있고 종종 건물 뒤편에 두 번째 파티오가 있는 형태의 주택에 거주했다. 측면 파티오가 있는 주택은 그 후에 나타났는데, 대개는 소형 건물을 구획하거나 중앙 파티오가 있는 건물을 분할할 때 생겨났다. 중앙에 파티오가 있는 주택의 일부가 분리되어 생긴 초기의 하위 집단 건물들에는 장식된 정문과 내부 구조, 발코니, 갤러리와 같은 중요한 특징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출처 : 댕견 그리고 우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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