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715)/ 니카라과
레온 비에호 유적(Ruins of León Viejo; 2000)
Church of La Recolección
Church El Calvario
Spanish colonial home
Spanish colonial home
Couple at Poneloya Beach, just outside León
Poneloya Beach, just outside Leon at sunset
레온 주[Department of Leon], 라파스센트로 시[Municipality of La Paz Centro], 모모톰보 항[Puerto Momotombo]에 위치한 레온 비에호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스페인 식민시대의 촌락이다. 레온 비에호 유적은 스페인에서 개발에서 소외됨으로써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유적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인 잠재적 가치로서도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레온 비에호 고고 유적지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자재에 유럽의 건축 및 설계 개념을 적용한 초기 신대륙 정착촌의 형태와 성격이 매우 독창적인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레온 비에호 고고 유적지는 초기 스페인 식민지 정착촌 중의 한 곳인 이 마을의 물질문화를 보여 주는 매우 훌륭한 증거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레온 비에호 유적지는 매우 중요하며,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유일한 역사적 기념물일 것이다. 레온 비에호 고고 유적지가 높이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보존 상태 덕분이다. 사실상 16세기에 건설된 도시가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로 보존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16세기에 스페인 정착민들과 토착 원주민이 접촉하였던 최초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실물 자료이므로, 레온 비에호는 여러 가지 발굴 기법을 실험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실험장이다. 레온 비에호에서 발견된 실물 자료들을 토대로 비교 가능한 연대를 설정하여 니카라과와 인근 지역에 위치한 다른 유적의 시대를 결정하는 표준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선 스페인계 원주민의 존재로 볼 때, 이 유적은 토착 원주민과 스페인 촌락 사이의 인구학적・사회 경제학적 역동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게다가 매몰된 유물 자료는 스페인 사람들이 유럽에 소개한 식단과 새로운 질병 등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역사 고고학이 아직까지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레온 비에호는 이 학문의 발달에서 전기를 맞이할 매우 핵심적인 유적일 수 있다. 한때 니카라과 지방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유적지는 세부적인 고고학 조사가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초로테가(Chorotega)족 인디언들에게 정복당하기 전부터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던 지역이다. 초기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은 이 마을을 선출된 연장자들로 구성된 협의체가 이끄는 어느 정도 위계화된 구조를 가진 농업 사회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페인 촌락은 1524년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Francisco Hernandez de Cordoba)에 의해 설립되었다. 코르도바는 페드라리아스 다빌라(Pedrarias Davila; 1440~1531)에 의해 파나마(Panama)에서 파견된 인물인데, 테소아테가(Tezoatega; 오늘날의 엘 비에호)까지 태평양 북부 지역을 정복하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다른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마을처럼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한 테소아테가는 레온 호수[Lake of Leon]라고 불렸던 가장 먼 동북 연안에서 개발되었다.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정복한 영토를 지배하고, 폰세카(Fonseca) 만과 올란초(Olancho)의 광산촌, 카리브 해 연안의 아구안(Aguan)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이 마을의 역할이었다.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1526년 반역죄를 이유로 페드라리아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새 수도의 모습을 그다지 오랫동안 즐길 수는 없었다. 1528년 페드라리아스는 친히 니카라과 총독의 자격으로 레온을 찾았는데, 그 해는 프란시스코 데 보바디야(Francisco de Bobadilla)에 의해 최초의 수녀원이 설립된 해였고, 동시에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수천 명의 원주민 사망자를 기록한 해였다. 그 후 상당수의 원주민들이 파나마와 페루에 노예로 팔려 나감에 따라 이 지역의 원주민 수는 보다 급감하였는데, 원주민 노예 수출은 레온이 담당했던 주요 역할이었다. 이 중요한 해가 저물 무렵에는 왕실의 명령에 따라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금과 은, 기타 다른 금속을 가공하기 위해’ 조폐국이 설립되었고, 이것이 노예 수출과 함께 레온 마을의 경제를 이끄는 두 번째 중요 사업으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두 가지 사업 모두 단 8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폭력과 인구학적 재앙을 양산하였다. 한 지방의 수도였지만, 레온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토착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나무나 대나무, 진흙 등의 자재로 지었기 때문에 거의 모두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투박한 수준이었다. 로소야(Lozoya) 후작의 경멸적인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초라한 오두막[mezquinas barracas]’에 지나지 않는 건물들만 있었다. 옛 마을에 남아 있던 폐허는 새로운 정착촌을 세우는 데 바로 이용할 수 있는 건축 자재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직 교회와 수녀원, 총독의 관저, 소수 부유층 시민의 저택들만 좀 더 정교한 형태를 띠고 있을 뿐이다. 정착촌이 들어섰던 초창기에 세워진 요새는 방치되어 이 지역의 평화 상태를 증명이라도 하듯 20년 만에 폐허로 전락하였다. 토속 자재로 건립된 왕립 주조 공장과 조폐국 역시 크고 튼튼한 건물이었지만 일련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초기 단계부터 마을에서 일했던 다양한 장인들의 범위에 비추어 판단해 볼 때, 거주민들의 물질적 욕구는 충분히 만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온은 1545년경 로드리고 데 코트레라스(Rodrigo de Contreras) 총독의 치세 하에서 최고로 발달하였지만 상대적으로는 여전히 작은 마을이었다. 스페인 거주민의 수는 200명을 넘지 않았다. 1578년 인근의 모모톰보(Momotombo) 화산이 폭발하고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부유한 거주민들은 마을을 떠났다. 1603년에 이르러서는 단 10채의 가옥만 남았고, 나머지는 버려져 폐가가 되었다. 1610년 1월 11일은 최후의 타격을 입은 날로 기록되었다.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남아 있던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마을은 ‘6리그[약 18마일] 떨어진’ 수브티아바(Subtiava) 마을 인근으로 옮겨졌다. 이 마을의 설계도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한 재건 작업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규칙적인 격자 형태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에 세워진 마을인 리마(Lima)처럼 규모가 컸던 것 같지는 않다. 1968년 이 유적이 발견된 이래로 수행된 발굴 조사 결과 상당수의 건물군이 드러났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건물로는 중앙 통로, 동쪽 끝의 계단을 이용해서 오르는 제단이 남아 있는 대성당, 토담 벽으로 둘러싸인 5개의 방, 수녀원 교회와 바로 연결되었던 라메르세드(La Merced) 수녀원, 11개의 방을 갖추어 마을에서 가장 대규모 건물 중의 하나였던 왕립 주조 공장, 개인 소유의 주택 몇 채[그 중의 일부는 이 마을에 거주했던 사람의 집으로 추정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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