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695)/ 멕시코
케레타로 역사 기념물 지대(Historic Monuments Zone of Querétaro; 1996)
Mission at Tancoyol
Mission at Jalpan de Serra
Facade of San Miguel Concá
Portal at the mission in Tilaco
Double headed eagle on the facade of the Concá mission
케레타로 주[Etat Queretaro] 케레타로[municipalite de Queretaro]에 위치한 옛 식민 도시인 케레타로는 원주민 지역의 구불구불한 도로와 스페인 정복자들이 건설한 기하학 형태의 도로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곳에는 오토미 족(Otomi)・타라스코 족(Tarasco)・치치메카 족(Chichimeca)이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17∼18세기에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이곳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종교・문화 기념물들이 유명하다.
엘 푸에블리토(El Pueblito)나 엘 세리토(El Cerrito)로 알려진 넓은 고고 유적지는 30m 높이의 피라미드가 우뚝 솟은 케레타로의 중심부에서 7㎞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의 제한적인 탐사 작업은 도시의 성장에 두 단계의 시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두 시기는 400∼600년의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시대와 650∼1050년의 톨테크(Toltec) 시대로 나뉜다. 케레타로는 식민 도시의 이례적인 사례로, 도시의 배치가 다민족을 상징한다. 특히 이곳에는 17∼18세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스페인 침략 당시 엘 푸에블리토나 엘 세리토 주변에 버려진 영토들은 치치메카 족의 영토였는데 그들은 아즈텍 제국의 수도에서 온 오토미 족에게 점령당했다. 오토미 족은 1520년경에 현재 마을에 정착했다. 오토미 족의 족장 코니(Kho-ni)는 페르난도 데 타피아(Fernando de Tapia)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1523년에 스페인 사람 후안 산체스 알라니스(Juan Sanchez Alanis)와 함께 이 지역에 원주민 마을을 세울 것을 허락받았다. 2년 후 스페인 정착민들이 타라스코 원주민과 함께 레르마(Lerma) 강을 따라 올라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이 마을 이름을 ‘구장(球場)’이라는 뜻의 ‘케레타로’라고 지었는데, 이는 거주지가 들어선 좁은 계곡의 지형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부터 이 도시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원주민인 오토미 족・타라스코 족・치치메카 족이 스페인 사람들과 이 지역에서 함께 살았다. 원주민들은 산체스 알라니스에게 도시의 설계를 맡긴 스페인 사람과 이 지역을 서로 공유했다. 유리한 환경과 지형적 조건 덕분에 새로운 식민 도시 조직 개편과 틀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이 도시는 뉴스페인(New Spain)의 수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남동부의 산악 지대 사이를 연결하는 중심지였는데, 길은 북서쪽으로 비옥한 저지대를 거쳐 태평양 연안까지 700㎞에 달했다. 동시에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한 남쪽 지역과 치치메카 족처럼 사나운 유목민의 통치에 있던 북쪽 지역 사이에 경계가 생겼다. 이곳은 과나후아토(Guanajuato)와 사카테카스(Zacatacas) 광산 도시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멕시코의 푸에블라(Puebla)에 이어 이곳은 1680년 말에 인구 30,000명이 사는 뉴스페인의 세 번째 큰 도시가 되었다. 18세기 중엽의 케레타로의 경제력은 건축 또는 재건축 중인 주요 건축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바로크 양식으로 도시의 외관을 장식했다. 19세기 초에 이 도시는 인구 40,000명의 ⅓을 고용할 정도로 직물 제조업과 담배 생산으로 번영을 누렸다. 1770년에 시장을 임명하고 예외적인 상업 활동을 장려할 만큼 당시의 자치권도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으로 케레타로의 경제 성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까지 이 지역은 군사적인 교전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았다. 1848년에 미국과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1867년에 투옥된 막시밀리안(Maximilian) 국왕은 자신의 군대가 패하자 바로 처형당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자 케레타로는 한 번 더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레푸블리카 대극장[Teatro de la Republica]에서 회담이 열린 두 달 후, 1917년 2월 5일에는 혁명군에 의해 새로운 국가위원회가 서명을 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10∼1940년에 35,000여 명이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1950년에는 50,000명, 1970년에는 130,000명에 이르렀고, 현재는 450,000명에 이르고 있다. 이 도시는 언덕 위에 있는 1,500m 넓이의 평지에 두 곳의 경계가 있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르고 있다. 1,400개의 유적 중 20개의 종교 건축물과 15개의 일반 공공건물이 있다. 최초의 예배당인 라 크루스(La Cruz)는 계곡의 동쪽 끝 작은 언덕에 있다. 정부의 행정 소재지인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은 양쪽에 회랑이 있고, 정부 청사와 고위급의 저택들에 둘러싸여 있다. 케레타로는 주교의 집무실이 될 필요는 없지만 성당으로 할당되는 건물이 한 채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종파들이 그곳에 자신들의 교구를 세웠다. 최초로 프란시스코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 도미니크회에서 대형 건물을 세웠고, 이후 수녀회 종파뿐 아니라 예수회와 필리펜세스(Filipenses)로 이어졌다. 모든 수도원 건축물은 인상적인 바로크 양식을 남겼다. 그 중 산타 테레사(Santa Teresa)와 엘 카르멘(El Carmen) 수도원, 그리고 산타클라라(Santa Clara)와 산타 로사(Santa Rosa) 수도원은 특히 아름다워 이목이 집중될 정도이다. 케레타로에 지은 비종교적 건물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대개 바로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획기적이지는 않지만 독특하다. 이들 건축물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저택과 궁전 실내 장식에서만 다엽 아치의 건축물과 디자인이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점이다. 이러한 케레타로의 바로크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하고 특별한 양식은 ‘장미색 사암’으로 지어져서 그 성격이 더욱 강화되는데, 이 사암은 이 지역의 다른 곳에도 적극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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