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幻滅)의 비애
고 미 숙(연구공간 수유+너머)
“요술쟁이는 커다란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사람들을 불러 거울 안을 구경하게 하였다. 거울 안의 세상은 실로 황홀했다.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된 고층 누각과 전각들 사이로 아름다운 여인들이 생황을 불거나 비단 공을 차고 있다. 구름 같은 머리와 화려한 귀고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워 지상의 것이 아닌 듯했다. 또 각종 기물들은 하나같이 보배로워서 지극한 부귀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부러움을 참지 못하여, 그것이 거울인 줄도 잊은 채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요술쟁이는 구경꾼들을 꾸짖어 물리치고는 즉시 거울 문을 닫아 버렸다. 한참을 이리저리 거닐다 사방을 향하여 무슨 노래를 부르고는 다시 거울 문을 열어 사람들을 불러 보게 하였다. (오 마이 갓!) 그 사이에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전각은 적막하고 누각은 황량한데, 아름다운 여인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다만 한 사람만이 침상에서 모로 누워 자고 있다. 주위에는 멀쩡한 기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귀신들의 그림자만 득시글거린다. 갑자기 잠자던 이의 두 다리가 수레바퀴로 바뀌는데 바퀴살이 채 덜 되었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등골이 오싹하여 거울을 등지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환희(요술), 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
<열하일기>에 나오는 ‘환희기(幻戱記)’의 한 대목이다. 연암은 열하에서 온갖 기이한 사건들을 목격한다. 그 중 압권이 환희(요술)였다. <환희기>에는 무려 스물한 가지에 달하는 요술이 펼쳐지는데, 위의 장면은 그 절정이자 대단원이다. 연암은 이 대목에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그렇구나. 세계의 몽환이 본디 이와 같아서 아침에 무성했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의 부자가 오늘은 가난해지고, 잠깐 젊었다가 홀연 늙는 법이니 대체 생과 사, 있음과 없음 중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리오. 그러니 환영에 불과한 세상에 몽환 같은 몸으로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인연이 얽혀서 잠시 머무를 따름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몸에 지닌 재산을 지금 당장 흩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할지어다.”
하지만 아무리 감동적일지언정, 요술은 요술일 뿐이다. 즉, 요술이란 결국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연암은 이렇게 묻는다.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눈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이럴 땐 거꾸로 눈으로 밝게 본다는 게 도리어 탈이 되는 법,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도로 눈을 감고 가라”는 서화담의 유명한 일화가 나오는 대목도 바로 여기이다.
하지만 연암의 충고와는 반대로 근대인들은 오직 시각만을 신봉한다. “쇼를 하라, 쇼!”라는 광고문구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우리 시대의 일상은 모두 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문명이란 자신의 눈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환희기’의 일종인 셈이다. 그리고 모든 욕망이 그러하듯이, 이 시각의 퍼레이드 또한 만족을 알지 못한다. 이제 사람들은 소박한 쇼 따위에는 절대 반응하지 않는다. 휘황찬란하다 못해 눈이 부셔야만 비로소 쇼라고 인정한다.
환멸(幻滅)의 비애, 허(虛)를 실(實)로 오판한 데서
연말연시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시내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저 엄청난 ‘빛의 폭주’를 보라.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불빛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행복도 선물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불빛이 구사하는 현란한 ‘쇼’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입하면서.
정치경제의 메커니즘 또한 마찬가지다. 이번 대선에서 난무했던 장밋빛 약속들 또한 시각적 환타지에의 갈망에 다름 아니다. 그 갈망은 이제 ‘선진화’라는 미명 하에 더한층 극대화될 것이다. 환(幻)이 멸(滅)한데서 오는 깊은 적막과 비애가 도래할 때까지. 노신은 말한다. “환멸의 비애란 허(虛)가 허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허를 실(實)로 오판한 데서 일어난다”고. 과연 이 오판으로부터 벗어날 출구는 없는 것인가?
글쓴이 / 고미숙
· 고전평론가
· <연구공간 수유+너머 www.transs.pe.kr> 연구원
· 저서 :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2004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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