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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붕대의 아들들 / 조인호

문근영 2017. 10. 31. 12:38

붕대의 아들들

 

   조인호

 

 

 

마이클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처맞고 나서야 알았다

붕대란 이렇게 따뜻한 것이로구나, 양 한 백 마리쯤 구덩이에 고꾸라져 구덩이를 하얗게 채우듯 상처를 덮는 이 붕대란 것이 천사의 입맞춤이라는 것을,

 

청년은 국민참여재판장에서 붕대에 관해 역설했다

 

보라, 나의 상처를,

상처는 붉은 입을 벌리고

그를 변호했다

 

우우우… 이 가난한 자를 보세요 배우지 못했으며 배우지 못한 만큼 노동했으며 노동한 만큼 붕대를 감은 이 청년을 보세요, 우우우…

 

검사는 그를 향해 외쳤다

이 개 같은 자식아, 붕대로 너의 두 눈을 가리고 목을 매달아 죗값을 치러도 모자랄 마당에 붕대 타령이라니!

 

배심원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철부지 아들의 죄를 용서하듯

 

존경하는 판사님, 어서 저 가엾은 청년에게 새 붕대를 감아주고, 그가 재판장을 당당히 걸어 나가도록 문을 열어주십시오!

 

며칠 후

그는 감옥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무죄가 선고될 예정이었지만,

 

                     *

 

마이클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광장에선 누구든 붕대를 감아야 한다는 법이

국회의사당에서 통과되었다

 

나는 광장에서

개를 끌고 온 한 남자와 만났다

 

개가 나를 보고 잡아먹을 듯이 컹컹 짖었다

 

광장 밤하늘 한가운데 상처투성이 달이 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보세요, 달의 궤적을!

 

과연, 달이 기우는 쪽으로 붕대가 스르르

풀려 나오고 있었다

 

그의 한쪽 팔에 붕대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붕대를 감으세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당신을 동정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단지 상처가 당신을 고백하지 않도록

붕대로 입을 막으면 될 뿐이예요

 

                     *

 

마이클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처맞고 나서야 알았다

붕대를 감은 청년들에게 우르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우르르… 붕대를 뱉어내는 나,

양 울음이 목구멍 밖으로 자꾸만 흘러나오고

 

2017년, 찬 겨울 광장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다 그만둔다

 

                     *

 

청년이 앉은 천막 끝으로 구름이 흘러간다

 

붕대가 하늘 끝자락부터 풀려 나오고 있다

 

 

 

                     —《현대시》201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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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호 / 1981년 충남 논산 출생. 2006년 《문학동네》로 등단.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방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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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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