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서시
김신용
처음 하나의 시선이었을 때, 바닥에 떨어져 바닥과 수평이 되어 있는 하나의 시선이었을 때, 너는 세계의 부피를 겹겹이 껴입은 듯 걸어왔다. 무거운 짐을 지고 비계(飛階)를 오르듯 걸어왔다.
그러나 자라, 등에 무겁게 얹힌 갑피는 너의 방주, 바닥의 홍수에서 너를 건져줄 방주
자라, 너는 그 두터운 보호막으로 몸을 가리는 것으로서 오늘도 하루를 견뎌낼 외투를 장만하지만, 그 등이, 슬픔이 굳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라, 너의 목 또한 긴 동굴에서인 듯 빠져나올 때, 누군가는 아직도 세상은 비명, 비명의 연속이라고 말하지만, 그래, 이제 노동마저 바람을 소유한 자의 것이 된 오늘, 새의 날개로 수직 비행을 할 수 있는 자의 것이 된, 오늘
자라, 모든 포물선을 긋는 것들은 되돌아오는 길을 가졌다. 환상(環狀)의 무늬 같은, 되돌아오는 길을 가졌다. 그것은 발보다 머리가 더 무겁기 때문, 사유가 언제나 무덤이 되기 때문
그래, 생각하지 말 걸 그랬다. 네가 벌통 속에서 어떻게 꿀을 훔쳤는 지를, 아이들을 위해, 나비의 날개에서 어떻게 꽃가루를 훔쳤는지를, 그래, 상상하지 말 걸 그랬다. 등에 무거운 갑피를 얹고, 비계를 오르듯 한 발 한 발 걷는 것으로서 한 생(生)의 업을 삼았으면, 낭떠러지가 된 척추가 기둥이 되어주었을 것을, 벼랑이 된 척추 위에 너와, 너와집을 짓고 바람을 소유했을 것을
그러나 자라, 내 심장이 돌이 아니어서 무겁게 눈을 감은 오늘, 너는 오늘도 어두운 동굴에서인 듯 걸어 나온다. 걸어 나와. 꽃 한 송이를 내민다.
바닥과 수평으로 만들어 주는, 꽃 한 송이
그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인, 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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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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