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
김산
푸른 저녁이 등의 짐을 잠재우는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고독의 밀실로 말하노니,
그름의 검은 조등이 맨발 아래 스멀거리는구나.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벗은 사람 사이에서
분분히 포말 되는 거울의 말을 사랑한 적 있다.
섬이 떠다닌다. 한 섬 두 섬 세 섬 선한 양들을 부르듯.
섬은 별의 공도묘지. 저기 아래.
죽음의 정박을 절체절명의 몸부림이라고 이해하겠다.
어둠이 하얗다고 소년이 소리친다. 그것은 비석의 그림자를 본
늙은 매의 날갯짓이 전생을 파닥거리는 불온한 외침.
어린 송장이 관의 문을 열고 비로소 명멸하는 저녁,
잔디들이 일제히 일어나 향을 피우며 음복을 한다.
바람의 후레자식들이여!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라.
집을 잃은 성근 별들이 뜨거운 손을 잡고,
들개 한 마리가 앞발을 천천히 거두어 가슴으로 덮는다.
바람이 분다. 죽어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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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신』 2013년 봄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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