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글씨
박지웅
언 강물 위에 사랑한다 쓴 글씨
날이 풀리자 사랑은 떠났다
한때 강변을 찾았으나 강은 늘 빈집이었다
그 푸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다
어느 가스락에서 패랭이를 만나 패랭이꽃을 낳고
진달래와 한 살림 붉게 차리고 살다
그 꽃들 다 두고 어디로 가는가
객지에서 그대를 잃고
나 느린 소처럼 강변을 거닐다
혓바닥을 꺼내어 강물의 손등을 핥곤 했다
저문 강에 발을 얹으면
물의 기왓장들이 물속으로 떨어져 흘러가는 저녁
이렇게 젖어서 해안으로 가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객지에는 강물이 흐르고
그리하여 먼먼 신새벽
안개로 흰 자작나무 숲 지나
구름으로 아흔아홉 재 넘어 돌아가는 것인가
저문 강은 말없이 서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강은 언제나 옛날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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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 2012년 문학동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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