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사전
박진성
모든 얼음을 만져볼 수 없지만 나의 사전에는 자주 냉기가 다녀간다 나의 오감이 실패한 단어를 나의 사전이 대신 닿는다 그러니까 나무 안에 흐르는 꽃이 내 사전의 일이다
나의 모국어를 읽을 수 있는 대륙까지가 이 사전의 가능성이겠지만 멀리, 반도를 버린 무덤들도 무간으로 사전에 드나든다 문장도 사전에 정박할 수 있는 이유이다
푸른 송곳을 들고 한 남자가 자주 다녀간다 그 남자의 하루가 모르는 숲에서 혼자 쓰러지는 나무*일지라도 그건 나의 사전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 사람 키나르 집 앞 욘 강에 자주 시선이 빠지는 것도 죽은 사람들이 다시 푸른 눈빛으로 문장을 던지고 가는 것도 나의 사전의 일은 아니다
사전을 수첩이라 부르는 여자의 눈에서 다친 물고기를 건지는 일도 있다 어떤 날은 사전만 바라봐도 몸이 흐리다 나의 사전은 나의 신체를 흐르는 것이다 사전을 잃어버린 때마다 악천후가 신체로 드나들었지만 나의 죄 없는 부주의는 그때마다 다른 기후로 이주했다
이 사전이 끝날 때 모든 말들이 일어나 나의 한때를 버릴 것을 안다 폐허에서 무너진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이 나의 사전의 이름이다
* 이성복. 「모르는 숲 속에서 혼자 쓰러지는 나무」에서
---------------------------------------------------------------------------
-시집 『식물의 밤』2014년 문학과 지성사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물빛, 크다 / 문인수 (0) | 2017.09.07 |
---|---|
[스크랩] 푸른 글씨 / 박지웅 (0) | 2017.09.07 |
[스크랩] 지나가 버리는 것에 대한 메모 / 박형준 (0) | 2017.09.07 |
[스크랩]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0) | 2017.09.07 |
[스크랩] 하늘 골목 / 손택수 (0) | 2017.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