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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27) /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有德寺) 터 석불 좌상(石佛坐像)

문근영 2017. 2. 19. 10:19

<한국 문화재 수난사>(27) /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有德寺) 터 석불 좌상(石佛坐像)



일제의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는 헌병과 총칼을 앞세운 무단 정치로 악명 높은 식민지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의 문화재 보호에 있어서는 <고적 및 유물 보존 규칙> 공포와 고적 조사 위원회 설치 등 적절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5년의 총독부 박물관 설립과 고적·유물의 수집·연구, 전문가를 동원한 연차적인 고적 조사, 그 밖에 개인적으로 진상 받아 총독 관저에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최대 걸작 불상의 하나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과 기타 소장품 일부를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돼 있다.


그러나 이 데라우치도 만 6년 동안의 총독 재임 기간 중 이 땅의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무수히 혹은 진상 받아 일본으로 빼돌린 후, 자기 고향에 조선관(朝鮮館)’이라는 개인 수집품 진열관까지 세웠었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진열관 건물 자체가 서울의 경복궁에서 계획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가 얼마나 이중적인 식민지 통치자였던가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작고한 이홍직(李弘稙; 19091970) 교수가 1964년에 써서 남긴 <재일 한국 문화재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돼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 현 하기에 막대한 (한국의) 미술품과 전적을 수집해서 경복궁 안의 건물까지 이건하여 조선관이라 칭하고 거기에 보관하고 있어서 유명하였는데, 그 후 이것은 산일되어 지금 그 일부가 야마구치 현립 단기여자대학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밟혀져 있지 않다.”(<사학 연구>,18)


[석불 좌상] 서울 유형문화재 24


1913년께의 일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 금융 조합 이사로 있던 고히라 료조(小平亮三)라는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아주 품위 있는 신라시대의 완전한 석불 석가여래 좌상을 목격하고 몹시 탐을 내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데라우치 총독은 그의 관저[당시 남산 밑의 왜성대(倭城臺)] 정원 한쪽에 경주의 고히라 집에서 본 그 탐나던 석물이 어느 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시에 눈치 빠른 고히라의 충성스런 소행에 미소를 금치 못했으리라.


하룻밤 사이에 경주에서 서울의 총독 관저로 진상된 그 석불 좌상은 오직 좌대부의 하대석만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1939년에 그 하대석을 찾으려고 경주로 내려갔다가 결국 실패한 총독부 박물관의 한 조사자가 그 때 현지에서 확인한 다음과 같은 과거의 상황을 복명서에 적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할 제 그 석불을 보되, 재삼 되돌아보며 숙시하기에 당시 소장자였던 고히라가 총독의 마음에 몹시 들었음을 눈치 채고 즉시 서울 총독 관저로 운반하였다고 함.”


그 석불은 본시 경주 시외인 월성군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유덕사 터에 남아 있던 유물이었다. 그것을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거리낌 없이 저지르던 수법 그대로 불법 반출해 다가 자기 집 마당에 버젓이 놔두고 자랑하던 고히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하여 서울로 올라온 석조 석가여래 좌상은 계속 남산 밑의 왜성대에 그대로 전해지다가 1927년에 경복궁 뒤에 총독 관저(지금이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 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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