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24) / 삼국시대 최대의 걸작 금동 반가 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문근영 2017. 2. 12. 12:36

<한국 문화재 수난사>(24) /

삼국시대 최대의 걸작 금동 반가 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앞에서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 박사의 불상 관계 강연과 당시 어떤 일본인이 입수해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귀중한 금동 불상에 대해 언급한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1884~1964)는 또 이런 말을 쓰고 있다.


긴메이(欽明) 천황 때(일본 역사의 6세기 중엽)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일본으로 도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의 옛 땅인 부여 지방에서 아스카(飛鳥; 일본 역사의 67세기 문화) 식의 불상을 찾아 구해 봤더니 과연 그런 것들이 출토되는 것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이 백제의 불상을 찾아 헤매던 때의 짤막한 증언인데, 그렇다고 그들의 발길이 부여 쪽으로만 향했던 것은 물론 아니고, 경주의 신라 유적지와 기타 모든 지역의 절터 혹은 살아 있는 사찰에도 거침없이 그들의 검은 손길은 뻗쳐나가고 있었다. 역시 한일합방 이전부터였다.


두 패의 일본인 악당들이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정확히 어느 지역의 어떤 절에서 약탈해 온 것인지 일체의 경위를 흐린 채 서울로 불법 반출해 온 삼국시대의 최대의 걸작 불상 2구가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보 중의 국보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金銅彌勒菩薩 半跏思惟像)’ 2구가 그것이다.


학계가 아직 원위치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이 두 반가상 중이 하나는 1912221일에 이왕가 박물관이 2,600원이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서울에서 사들였는데, 그 때 그것을 판 자는 무법의 약탈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거나 그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던 고물상인 가지야마 요시히데(楣山義英)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정말 일확천금을 한 운수 좋았던 악당이었다. 총독부는 그의 불법적인 행위를 모른 체하였고, 결국 범인은 누구한테도 그 반가상의 반출지를 추궁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위의 개인적인 질문에도 원위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한 다른 지역을 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것은 악당들의 고의적인 증거 인멸 술책이었다. 이후 전문가들은 뚜렷한 증거나 자료가 없이 범인들이 작전상 퍼뜨린 것으로 믿어지는 풍문을 따라 불확실한 위치를 말하게 되었는데 세키노도 이 반가상은 경주 남쪽 오릉 부근의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1933년에 발표한 논문 <조선 삼국시대의 조각>에 쓰고 있다.


이왕가 박물관이 그것을 입수할 때에도 반출지는 경주 지방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아사가와는 <조선의 미술 공예에 관한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놀라운 불상이 이왕가 박물관의 광채로 모셔지기까지에는 당시 관장이었던 스에마쓰 마히코(末松熊彦)의 고심이 많았는데, 그에게 들은 바로는 출현지로 믿어지는 경주로부터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는 표면을 두터운 호분으로 칠하고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눈꼬리가 처지고 꼬불꼬불한 수염에 까만 눈동자 그리고 입술은 빨갛게 칠해져 고색은 커녕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더운 물로 닦아내고, 금빛을 안정시키기 위해 젖은 거적으로 싸고 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사가와의 회고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앞의 반가상이 세키노가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출현’(발견), 곧 어느 살아 있는 사암에 엄연히 전해되던 것을 몰래 약탈, 아니면 협박 혹은 매수하여 서울로 반출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세키노의 경주 지역 출토설인용을 신뢰성 없는 말로 만들고 있는 것은 1915년에 이네다 순스이(稻田春水)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있어서의 불교 예술 연구>라는 글에서 이왕가 박물관의 반가상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다.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는데 삼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며 세키노 박사도 감탄하였고, 또 독일의 박물관 기사도 와 보고는 십만 금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라고 하였다.”


이네다는 한일합방 전에 한국에 건너와 충남 계룡산에 머물면서 한국의 불교문화와 유물을 조사·연구했던 일본인이었다. 그는 한국말도 꽤 잘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이왕가 박물관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에 언급하여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 단정적으로 쓴 데는 그만한 확실한 정보와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 그것이 서울로 올라간 해가 정확히 1910년이었다는 대목도 신빙성 있는 증언이다. 그렇다면 그 반가상은 서울로 불법 반출된 후, 2년 동안 몇 다리를 건넜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가지야마라는 일본인 악당이 감추어 갖고 있다가 이왕가 박물관의 스에마쓰 관장과 은밀히 접촉한 끝에 2,600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무사히 팔아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사가와가 그것을 박물관이 입수하기까지에는 스에마쓰 관장의 고심이 많았다.”고 쓴 회고담은 그 때 가지야마가 값을 워낙 호되게 불렀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3,0004,000원쯤 내라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반가상은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 는 이네다의 기록은 세키노의 자신 없는 경주 지역 폐사지 출토설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만일 경주가 아니라 충남의 어느 벽촌이 정확한 반출지였다면 그 반가상은 신라가 아니라 백제불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가정이 성립된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도 <금동 미륵 반가상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고 회의를 표했었지만 가장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전문가는 황수영(黃壽永; 19182011) 교수였다.


황 교수는 1960년의 <역사 학보> 13집에 발표한 <백제 반가 사유 석상 소고>에서 이네다의 증언 기록에 주목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논급하고 있다.


이네다 역시 정확한 지명이나 전세, 출토의 구별이 없이 충청도 벽촌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벽촌에 있던 이름 없는 사암 같은 곳에서 발견, 반출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키노 박사가 만약 충청도 벽온으로부터의 출래설을 전문의 경주 지역 출토설과 함께 기록하였던들 이 유상(반가상)은 신라설에 앞서, 또는 동시에 백제의 것으로도 추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충청·백제설은 전혀 표면화되지 못하고 오직 경주·고신라설만이 유독 신봉되고 고수되면서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 거기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이왕가 박물관이 문제의 반가상을 입수하던 1912년에 형태와 크기가 거의 같은 또 하나의 걸작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이 어디선가 불법 반출되어 서울에서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총독 관저에 기증 형식으로 들어갔는데 세키노 박사의 기록을 빌리면 그 때의 기증자는 후치가미란 자였다. 그의 정체도 가지야마와 같은 일당의 장물아비였거나 고물(문화재) 약탈의 배후의 조종자였던 것 같다.


총독 관저에 들어간 반가상에 대해서도 세키노 박사는 애석하게도 출처가 명백하지 못하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발견된 것인 듯하다.”고 자신 없는 추측에 그친다.


모두가 일본인 무법자들이 유물의 불법적인 반출지나 출토지를 전혀 말하려 하지 않았고, 또 반출 혹은 약탈 경위와 증거를 완전히 인멸시킨 때문에 생긴 학계의 안타까운 수수께끼들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인 무법자들로부터 기증받아 개인 소유로 총독 관저에 갖고 있던 반가상은 그가 총리대신으로 승격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던 때인 1916418, 총독부 박물관(1915년 발족)에 기증되었다. 학계가 알고 있는 걸작 불상을 차마 도쿄로 실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국보 7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국보 83호



1912년에, 하나는 이왕가 박물관에 그리고 또 하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됐다가 총독부 박물관에 들어온 원위치 불명의 두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현재 모두 세계적인 명품이며, 국보 83호와 78호로 지정되어 국립 중앙 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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