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22) /
총독부의 가공할 사적 파괴령 비밀문서
처음엔 석탑 자체에만 눈독을 들여 어떠한 어려운 운반 조건도 무릅썼던 일본인 무법자들은 차차 탑 속에 들어 있는 사리 장치 유물만 꺼내는 새로운 범행을 병행시키게 되었다. 이 새로운 목표물은 무거운 큰 덩어리의 탑재들을 많은 인원과 시간을 동원하여 불법 반출하는 모험에 비하면 훨씬 손쉽게 성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탑이 깨져 나가거나 말거나 밀어서 무너뜨리고, 혹은 사리 장치가 있음직한 부분의 탑재 사이에 지렛대를 넣어 들어 올린 후 유물만 꺼내는 일은 몇이서 하룻밤 사이에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데에 잘 걸리면 작은 순금불 같은 굉장하고 진귀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악당들의 목표물은 더욱 다양해졌다.
석탑 속의 사리 장치 유물을 노리는 범행은 1920년대에 급격히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반출당하는 화를 면했던 탑들도 성한 것이 없게 되었다. 탑의 생명으로서의 비장품인 사리 장치 유물, 곧 삼국시대 이후의 금·은 혹은 금동제의 작은 불상·보탑·합 기타 사리병과 그 외함들을 약탈당하고 시신처럼 기울거나 파괴되어 균형을 잃은 탑들이 곳곳에서 일제 아래의 비운을 통곡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엽의 일이었다. 개성 시외에 있는 고려시대의 현화사 7층 석탑 속의 사리 장치를 노린 악당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고 무섭게 천둥이 치는 밤중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 탑신을 폭파했다. 가까운 주민들은 그 소리를 번갯불 천둥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날이 밝은 후에야 석탑의 처참한 수난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탑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상처투성이나마 제자리에 서 있는 기적이었다. 범인들은 얼마 후 경찰에 잡혔으나 그들이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사리 장치의 금제 유물은 벌써 금은방에 가서 두드려 짓이겨진 뒤였다.
1934년 11월 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당시 보물 15호의 지정 문화재였던 ‘고달사 터 부도’(현재 국보 4호)의 내부 유물에 손을 댄 자가 있었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피해 보고가 기록돼 있다.
“부도 전방 약 10m 거리에 있는 장군석을 들어다 부도의 기단 옆으로 기대놓고, 기계를 사용하여 연대(앙련이 조각된 상대석)를 한쪽에서 들어 올린 다음, 그 짬에 작은 돌들을 끼워 간격을 고정시킨 후, 내부를 뒤진 흔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기단 속에 고물(금속 유물)을 넣었을 장치(사리 장치)가 없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취당한 것으로 인정됨.”
무엇보다도 일제의 발악적인 석조 문화재 파괴와 무자비한 유린은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각 도 경찰부장에게 지시·명령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던 일제가 미·영 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패색에 휩싸이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 민족 사상과 투쟁 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애려고 든 것이다. 가령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기념비인 ‘황산 대첩비’를 비롯해서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남쪽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 땅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을 새긴 비석 같은 것들을 남김없이 말살시키라는 것이었다. 그 때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의 격파 기념비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고양 행주 전승비(幸州戰勝碑) 2. 청주 조헌 전장 기적비(趙憲 戰場紀蹟碑) 3. 공주 명람방위 종덕비(明藍芳威種德碑) 4. 공주 명위관 임제비(明委官 林濟碑) 5. 공주 망일 사은비(望日思恩碑) 6. 아산 이순신 신도비(李舜臣 神道碑) 7. 남원 운봉 황산 대첩비(荒山大捷碑) 8. 여수 타루비(墮淚碑) 9. 여수 이순신 좌수영 대첩비(李舜臣 左水營大捷碑) 10. 해남 이순신 명량 대첩비(李舜臣 鳴梁大捷碑; 현재 보물 503호) 11. 남해 명장량상 동정시비(明張良相 東征詩碑) 12.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泗溟大師 石藏碑) 13. 진주 김시민 전성 극적비(金時敏 全城劇敵碑) 14.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 충렬묘비(李舜臣 忠烈廟碑) 15. 부산 정발 전망 유지비(鄭撥 戰亡遺址碑) 16.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泗溟大師 紀蹟碑) 17. 연안 연성 대첩비(延城大捷碑) 18. 경흥 전보 파호비(廛堡破胡碑) 19. 회령 고충사타(顧忠祠墮) 20. 진주 촉석 정충단비(矗石 旌忠壇碑)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시국적인 고적은 소관 도 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실제 내용은 파괴)시켜도 좋다고 결정했을 때의 가공할 비밀문서의 내용이다. 1943년 11월 24일 기초된 이 문서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경부국장에게 넘겨준 후 각 도 경찰부장에게 비밀 지령으로 하달되었다.
“수제: 철거할 물건 중 ‘황산 대첩비’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 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시국의 국민 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 방법을 강구할 것.
참조: ‘황산 대첩비’는 보존령(총독부 고적 및 유물 보존령)에 따라 지정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 존재는 당시 일본인 해외 발전의 사적의 증징이기도 하고, 그 비석의 형식은 미술상·학술상 시대의 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지에서 보존시킴이 이상적이겠으나 그 존재가 치안 상 철거해야겠다는 관할 경찰 당국의 의견은 현 시국에 부득이한 것으로 간주됨.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임.”
이 비밀문서 뒤에 앞에서 소개한 파괴 대상의 비석 목록이 첨가되었는데 제목은 ‘황산 대첩비’를 예로 든 (현존 유사품 일람표)였다. 이후 각 도에서는 일제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이 땅의 역사적 민족적 항일기념 유적들이 모조리 파괴당하는 통분스런 일을 겪게 되었다.
1380년 9월에 당시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이지란 장군과 함께 지리산 근방에 침입한 왜적 아지부대를 크게 무찌른 승리의 사실이 새겨져 있던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의 ‘황산 대첩비’가 맨 먼저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었다. 총독부의 승인을 받은 전북 경찰부장은 1577년에 건립되어 400년 가까이 민족의 한 수호비로 살아 있던 ‘황산 대첩비’를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무자비한 발악의 상징이었다. 대첩비가 섰던 자리엔 지금 한두 조각의 비편만이 남아 일제 치하의 잊을 수 없는 굴욕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고, 사적 104호로 지정돼 있다.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황산 대첩비’가 세워졌다.
합천 해인사에 세워져 있던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인 승병장이자 고승이었던 사명대사의 ‘석장비’는 경남도 경찰부장의 지시·명령에 따라 1943년 12월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의 건봉사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사명대사의 ‘기적비’도 같은 때에 같은 운명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최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 충무공의 ‘명량 대첩비’와 여수의 ‘좌수영 대첩비’ 및 ‘타루비’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혹은 왜군 격파 기념비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도록 비밀 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주민들은 그것들이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드디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했고 이 땅엔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해남과 여수의 지방 유지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일제에게 빼앗겼던 이 충무공 대첩비들의 안전 여부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으나, 파괴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 후 지방 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져 갔다. ‘명량 대첩비’는 현재 보물 503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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