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5) /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과 불우한 천재 고람(古藍) 전기(田琦)
오경석의 사진
1872년 북경에서 프랑스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梅輝立)이 찍은 것이다.
오경석의 글씨와 그림
오경석의 어머니 이 씨의 50세 생신을 기리며 역관 5형제가 부귀와 장수를 뜻하는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맏아들 오경석은 <봉래선거도>를 그리고, 한대 금석문 가운데 길상과 장수를 뜻하는 명문을 썼다.
오경석이 추사의 <금석과안록>을 발전시켜 저술한 <삼한금석록> 가운데 '진흥왕 정계비' 부분
오경석 전용 원고지에 친필로 썼다.
역매 오경석(1831~1879)이 어려서부터 그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3~1865)에게 글씨와 시문을 지도 받고, 서화의 안목도 높일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가 청나라를 드나들기 직전인 스물 안팎 때의 가장 가까웠던 선배로서 그의 시문과 서화를 늘 예리하게 비판해준 사람은 당시 시·서·화 삼절의 혜성 같은 천재였던 고람 전기(1825∼1854)였다. 역매보다 불과 여섯 살 위였건만 그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고, 그 때문에 서울 장안의 서화 애장가와 수집가들이 줄곧 그에게 감정과 평가를 의뢰해 오곤 했었다. 역매도 집안에 들어온 서화 폭들을 언제나 그에게 보였던 것 같다. 그때의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흥미 있는 고람의 편지들이 전해지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1879년(고종 16)에 작고한 아버지 역매의 생활 기록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고람의 편지들을 서첩으로 꾸민 듯한 <위공소찰(瑋公小札)>(이겸로 소장)이라는 책자가 그것이다. 역시 위창의 부탁으로 서첩의 표제를 쓴 듯한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 1832~1914, 서울 광화문의 현판을 쓴 당대의 유명한 교양인이며 서화가)가 표제 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고 있다.
“위공이 역매와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40년 전의 일로서 손님이 앉은 자리에서 얘기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휙휙 쓰던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 그 글씨들을 대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몽인은 쓴다.”
앞의 발문으로 미루어 몽인은 아깝게 요절하였으나 천분의 재예와 안목으로 출중했던 고람을 그의 가난한 생활의 방편이었던 한약방으로 자주 찾아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몽인은 고람보다 일곱 살 위였다. 그런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창도 그에게 특별히 <위공소찰>의 서첩 표제를 간청했던 것 같다. 다음에 편지 내용을 몇 대목 소개해본다(모두 고람이 역매에게 써 보낸 것).
“담계(覃溪)와 석암(石庵)-중국의 유명한 서화가들-의 대련 2폭을 어제 저녁에 권 군이 가지고 왔는데 우선 여기 놔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당신의 감정이 틀림없는 것 같다. 책 2권을 받았다.”
“어제 보낸 서화 12폭 중에서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정수첩>(화첩인 듯) 1권뿐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표(청대의 유명한 화가 황진)의 족자는 돌려보낸다.”
“며칠 앓고 일어났다. 마침 부득이한 용차가 있어 부탁하니 가진 것이 있으면 20냥만 4∼5일간 빌려줄 수 없겠소? 이런 일을 부탁하니 미안하오.”
“보내준 예서 대련(역매가 써 보낸 글씨)은 재기가 넘쳐서 매우 좋은 데가 있다. 그것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름이 날 만하나, 그러나 붓을 뉘어서 쓰고 중봉(붓의 중봉)을 많이 쓰지 않았고, 짜임새도 어색한데가 있어서 조금 흠이다. 한대의 비첩을 많이 보고 문자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한다면 옛 사람 부끄럽지 않겠다.”
이 편지 내용만 보아도 청나라를 드나들기 전까지 역매는 고람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모든 것을 상의하면서 교양과 안목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19세기 중엽, 서울에서의 국내외 신·구 서화의 유전 및 감정·평가의 내막을 알려주는 고람의 흥미 있는 편지들은 <위공소찰>로 묶여진 것 외에도 또 하나의 묶음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돈 많은 수집가였던 모양인 경연재라는 사람(이름은 불명)이 고람에게 서화의 감정 및 검토를 부탁했다가 받은 편지들인데, 이것은 역매의 경우와는 달리 수신인 자신이 생전에 서첩으로 꾸몄음이 분명한 것이, 표지에 ‘두당척소(杜堂尺素)’라 쓰고 그 아래에는 ‘경연재 심장’이라 적고 있다(임창순 소장). ‘두당’은 고람의 별호였다. 이 서첩에는 당시의 그림 값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밝혀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특히 흥미롭다.
“(보내온 그림의) 8폭은 보잘 것이 없다. 살 것이 못 되나 40냥 부른 것을 수차 흥정하여 24냥까지 내려갔는데, 그 이하는 나로선 다시 얘기하기가 어려우나 원한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겠다.”
“설재의 그림은 값이 15민(냥)이라는데 주인이 도로 찾고 있다(경연재가 가져갔던 듯). 도로 보내라. 그림도 그다지 좋지 않다. 모처(추사나 우선 같은 최고의 안목인을 가리킨 듯)에 감정을 의뢰했다간 코웃음을 받을 게다. …요새 들으니 구리개(지금의 서울 을지로) 이 첨정 집에 서화 수십 종이 있다는데 들은 적이 있는지? 가서 보고 싶다. 볼 길이 없을까?”
역매가 역관으로서 청나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고람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천재의 생애를 마치기 1년 전인 1853년(철종 4)의 일이었다. 이후 1879년에 4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10여 회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했고, 그러는 동안 중국의 서화·골동품·금석문 탁본 등을 무수히 수집해 가지고 옴으로써 서울의 서화가와 교양인 사회의 중국 문화 접촉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그는 저쪽의 새로운 문명 서적들도 계속 가져옴으로써 이 땅의 개화사상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역매는 그의 교양 생활의 중심이었던 귀한 서화 컬렉션을 더불어 감상하고 즐겨주었어야 할 고람이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는 사실에 고독을 금치 못했던 것 같다.
만년에 남긴 문집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에서 역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계축년(癸丑年; 1853년)부터 갑인년(甲寅年; 1854년)에 걸쳐 비로소 연경에 원유하게 되면서 여러 박아지사와 교유하고 견문을 더욱 넓히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원·명 이래의 서화 110여 점을 구득하게 되고 삼대, 진·한의 금석문과 진·당의 비첩도 또한 수백 점을 모았다. 비록 당·송의 진적을 얻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압록강 이쪽에서는 자랑할 만하다. 내가 이것들을 얻는 데는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고, 또 그것들이 천만리 밖에서 모아들인 것이니 마음과 정신을 크게 쓰지 않았던들 참으로 쉽사리 얻을 것이 못된다. 나와 같은 벽을 갖고 있던 사람이 고람 전기였는데 불행히 일찍 죽어서 내가 수장한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다. 죽은 그를 다시 살려서 같이 토론하며 감상할 수 없을까? 이것을 쓰면서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청나라를 드나들던 초기인 1858년(철종 9)에 역매는 저쪽의 금석학 연구가인 유희해(劉喜海; 1793~1852)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추사(秋史)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에 자극을 받은 듯 금석학 취미와 각별한 관심으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라는 자그마한 책자를 엮었다(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내용은 추사가 이미 독자적으로 발견하고 고증하여 그의 <금석과안록>에 기록한 ‘신라 진흥왕 정계비(新羅眞興王定界碑)’와 역시 추사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고증한 바 있는 ‘평양 성벽 석각(平壤城壁石刻)’ 등의 국내 금석문을 원문으로 모으고 거기에 약간의 해설과 청나라 및 국내 학자들의 논평을 곁들인 것이었다. 당시 역매의 나이 28세였다.
역매의 <삼한금석록>에 처음으로 기입된 ‘평양 성벽 석각’ 금석문은 추사가 44세 되던 해인 1830년(순조 30)에 묘향산을 탐승하고 돌아오다가 평양의 옛 성벽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 때 그의 예리한 고증학적 안목은 성벽에 끼어져 있던 깨진 옛 석각 편에서 ‘物荷小兄(물하소형)’ 등 마멸이 심한 20자 내외의 글자를 판독했을 뿐인데도 자체의 고법과 단편적인 고구려의 관직명을 들어 ‘틀림없는 고구려의 금석문’이라고 갈파했었다.
그런데 이 ‘평양 성벽 석각’은 그 후 언제 어떤 경위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의 성벽에서 떼어져 서울로 운반되었다. <삼한금석록>을 적을 당시에 역매가 그것을 직접 입수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훨씬 뒤에 위창이 수집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10년대 중엽의 신문 기사는 그 귀중한 석각 문화재를 위창이 애장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오늘날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금석문인 이 성벽 각자는 1965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들어갈 때까지 위창 집안에서 갖고 있었다.
위창은 역매가 수집한 국내외의 풍부한 미술품 컬렉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이 위창이야말로 한국의 서화시와 기타 민족 문화재 연구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최초의 근대 인물이었다. 그는 서화와 갖가지 진귀한 문화재가 모아져 있는 선택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미의 안목을 높일 수 있었고, 또 혈통적으로 타고난 취미는 그로 하여금 뒷날에 가서 근대적인 서화 연구의 개척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중국 것이 중심이었던 아버지의 수집품에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고 수집한 희귀한 고서화들을 보탬으로써 2대에 걸친 최대의 컬렉션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서화만을 높이 사려고 했던 그 전까지의 문화 식민지적인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이 땅의 민족 서화사 기록들을 가능한 모든 문헌에서 찾아내어 정리하는 한편 유존하는 고서화들을 파악 혹은 수집·보호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선각적인 민족 사관과 주체 의식은 수집가이자 개화파의 외교관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쇄국 세력 밑에서 박규수(朴珪壽; 1807~ 1877) 등과 개국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1876년(고종 13)의 강화도조약을 성공시킨 배후의 주역자였던 아버지 역매의 행동적인 사상에서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자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국의 서양 문화재와 기타 모든 문화유산에 대한 근대적인 재인식과 민족적 자부는 전적으로 위창 오세창의 학구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싹텄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새로운 사상과 견식의 성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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