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 /
근대적인 금석 고증학의 선구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원래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
1928년에 최초의 한국 서화가 인명사전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편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 간행되었을 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신문에 기고한 서평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이 세계에 있어 오랜 문화국이요, 가장 의의 있는 문화적 일민방임은 이제 새삼스레 들출 것 아니거니와 예술 업적도 타국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본다. 다만 타에 비하여 조선은 그러함을 아는 이가 적고, 또 누구든지 그러함을 환히 알도록 작품을 많이 또 고루 전존하지 못하고, 또 작가와 작풍 및 그 계통·영향 등에 관한 기록·연구가 행하지 아니하여 예술적인 외관이 번듯하지 못할 따름이다. 오늘날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어의에는 당연히 조선 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으로 인함이다.”
이어서 육당은 위창의 <근역서화징> 편저와 그의 수십 년의 연구 생활이야말로 “조선의 예술적 기업을 호지함이며 가장 암혹한 운중에서 가장 섬삭한 전광”이라고 감격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실 위창 오세창은 이 땅의 문화유산, 곧 민족 문화재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인 연구가였고 수집가였다. 3·1운동 33인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항일 투쟁의 선봉에도 섰던 위창은 서예와 서화 감식안에서도 당대의 제일인자였다.
위창의 선각적인 문화재 연구 업적과 공헌은 오늘의 고고학 및 미술 사학계의 선구였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과 새로운 가치관은 18세기 이후 중국에서 전파된 새로운 과학적 학풍인 고증학의 실학사상이 싹틀 때에 여명기를 가졌다. 이 여명기의 최대의 거인은 말할 것도 없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였다. 24세 때(1809년)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 후로 추사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사상으로 근대적인 금석 고증학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 금석학의 체계를 세운 연구학자였다.
추사의 금석학 연구의 가장 전설적인 기록은 서울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에 올라가서 그때까지 아무도 정확히 그 역사와 내용을 알지 못했던 이끼 낀 돌비석의 비문 각자를 판독·고증한 일이다.
비봉 원 자리의 진흥왕 순수비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를 판독하고 측면 쓴 비문
새로 만든 비봉의 순수비 유지
1816년(순조 16) 7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한창 심취하고 있던 31세의 추사는 김경연(金敬淵)이란 친구와 비봉 꼭대기의 수수께끼의 옛 비석을 조사·판독하기 위하여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들은 조선 한양 도읍 때의 유명한 배후 인물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와 관련이 있다는 막연한 전설의 비문을 이끼 속으로 짚어 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비문 내용이 무학대사는커녕 1천 수백 년 전 신라 진흥왕(6세기 중엽)의 순수비임을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사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감격적인 발견이었다.
추사가 김경연과 더불어 북한산 승가사(僧伽寺)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비봉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고색 짙고 마멸이 심한 돌비석의 비문을 처음으로 판독·고증할 때까지 그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빠져 있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 기념비(국보 3호)임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도 오히려 엉뚱한 전설이 비석의 역사적 가치와 정체를 흐려놓고 있었다. 가령 1750년께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는 이런 전설을 적고 있다.
“무학대사가 이 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백운대로부터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이 비봉에 이르렀더니, ‘무학은 이곳을 잘못 찾아왔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발길을 되돌렸다.”
추사는 비봉의 비문을 탁본해 가지고 내려와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의 내용을 더욱 신중히 고증하였다. 그는 비문의 ‘南川軍主(남천군주)’라는 네 글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인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다’로 미루어 568년(진흥왕 29)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결론은 오늘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문화재 대관> 국보편 해설, 문공부 발행).
한편 추사가 비봉의 비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고증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시한 사람은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이었다. 뒷날 영의정(領議政; 정1품)을 지내는 운석은 그 해에 마침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의 금석학 연구가인 유희해(劉喜海; 1793~1852)와 친교를 맺게 되었고, 귀국하면서 조선의 금석문 탁본을 수집하여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추사가 새로 발견했다는 신라 비문은 그의 청나라인 친구를 위해 다시없는 선물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다음 해(1817년) 6월 8일, 추사는 운석을 데리고 두 번째로 비봉에 올라가서 그들이 실력 껏 읽을 수 있었던 68자를 최후로 확인하였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 비문 탁본을 즉시 중국의 유희해에게 보내주었다. 그 외에도 운석은 태고사(太古寺)의 ‘원증국사 탑비(圓證國師 塔碑; 보물 611호)’(고려 말) 등 97종의 금석문 탁본을 마련하여 보내줌으로써 유는 청나라에 가만히 앉아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라는 조선의 금석문 책을 2권씩이나 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추사가 발견한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새로운 귀중한 금석문 사료는 국내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청나라에서 꾸며진 책 속에 먼저 수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판독한 추사는 또 그러한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과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석 측면에 굳이 새겨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자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는 병자년(1816년) 7월에 김정희·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년) 6월 8일에는 김정희·조인영 같이 와서 읽을 수 있는 68자를 심정했다.”
오늘 같으면 문화재의 현상 변경으로 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전의 고구려와 백제 땅이었던 곳을 점령하여 신라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진흥왕은 재위 29년(568년)에 새로운 국경을 순방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그리고 그때의 행차를 기념하여 여러 곳에 ‘순수 정계비’를 세웠다. 추사가 북한산 비봉에서 발견한 것은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 ‘진흥왕 정계비’는 북한 지역인 함경남도의 황초령과 마운령의 두 곳과 경남 창녕 것을 합해 모두 네 곳에서 발견되었고, 창녕 것은 지금 국보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창녕 것은 맨 먼저 세워진 것으로 건립 연대가 서기 561년(진흥왕 22)으로 비문에 나타나 있다.
추사 자신은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처음으로 발견한 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이미 <해동집고록(海東集古)>을 빌려 기록되어 있는 황초령비의 내용을 참작함으로써 그의 북한산비의 고증에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황초령비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고, 다만 간접으로만 그 내용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1852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추사는 그와 친숙한 사이였던 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 종2품)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황초령의 진흥왕 정계비 탁본을 입수하여 북한산 것과 대조하며 자신의 눈으로 또 한 번 고증·판독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학문적인 기쁨과 고증의 감동을 또다시 기념하기 위하여 ‘眞興北狩古竟(진흥북수고경)’이라는 여섯 자의 현판 글씨를 자신의 독창적인 ‘추사체(秋史體)’로 자필하여 함경도로 보내주었다.
그 후 이 현판은 황초령비를 보호하기 위해 관찰사가 지은 비각에 걸려 있었고, 현재 우리는 그 목각 현판의 탁본을 볼 수 있다. 현판뿐 아니라 추사는 그에게 탁본을 보내준 관찰사 윤정현을 대신하여 황초령비의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새로운 비문을 짓고, 또 스스로 써서 보냄으로써 유적의 해설비로서 옆에 세우게 하였다. 비문에는 ‘윤정현 서’라고 되어 있으나 그 자체가 추사의 글씨라고 금석학자 임창순(任昌淳; 1914~1999) 선생은 감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 신라 진흥왕비는 동북 정계로 구지는 황초령인데 돌이 위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글자가 185자만이 남았다. 지금 중령으로 옮겨 비각으로 덮고, 암벽에 끼워놓았다. 황초령과 멀지 않아 경계에 큰 차는 없다. 옛날 탁본을 가지고 보면 첫 줄 ‘왕’자 아래에 ‘巡狩管境刊石銘記(순수관경간석명기)’의 글자가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없어진 것을 보충한다.”
황초령비를 위해 특별히 현판과 새로운 비문을 쓴 직후, 추사는 근대 한국 최초의 고고학적 연구 논문인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남겼다. 곧 그가 직접 발견한 북한산비와 탁본으로 확인한 황초령비에 대한 고증과 해설을 기록한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다.
<금석과안록>에서 추사가 시도한 과학적 논증은, 1)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 시에 사용한 칭호이며, 2) <삼국사기>는 진흥왕의 북순 사실을 빠뜨렸고, 신라의 국경을 안변까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3)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짐’·‘제왕’이란 말을 쓴 것은 그때 신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 추사는 비문에 나타나는 신라의 지명·관명·인명 등을 분석했다.
1786년에 판서의 아들로 태어나서 1856년에 71세로 타계한 추사 김정희는 일찍이 청나라에 갔을 때, 당시 북경의 유명한 석학이던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을 가까이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추사는 그들과 계속 친교를 맺으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의 타고난 총명과 끊임없는 탐구는 이윽고 경학·사학·고증학·서예·금석학에 걸쳐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고 넓은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와 병조 판서(兵曹 判書; 정2품)를 역임했으나 정치 사건에 연루되어 전후 10년간의 귀양살이-제주도와 북청에서-를 당하는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속에서 그의 학문과 예술은 찬연하게 연마되었다. 그의 글씨는 대단히 창조적이고 뛰어난 명필로서 한국 미술사에 빛나고 있고, 또한 서화의 감정과 평론에서도 그는 당대의 거벽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예술 사상은 그의 뒤를 잇는 세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대로 청나라를 내왕하던 역관 집안에 태어나 역시 역관이 되었던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은 추사보다 45세나 아래였으나 어려서부터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흠모한 문인이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23세 때(1853년)부터는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쪽의 새로운 학문 사상과 서양의 문물을 접촉하였다. 그렇지만 청나라를 내왕하기 전부터 가졌던 금석학에 대한 관심이나 시·서·화에 대한 각별한 취미와 연구는 당대의 거성인 추사와 그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 자극과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대의 역관 집안이어서 청나라의 진귀한 서화를 포함하여 국내외의 미술품이 집에 많았다는 가정환경이 역매를 당시 서울 장안의 대표적인 교양 인사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 행운의 조건이었다. 그가 추사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친구였던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을 진작부터 접촉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받고 또 그를 통해 추사의 세계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이었던 것은, 그러한 가정적인 조건이 작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역매보다 27세나 위인 우선은 당시 추사 다음 가는 안목과 교양을 지닌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매가 청나라에 가기 훨씬 전에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그곳을 다녀왔고, 그때마다 그가 수집 및 입수할 수 있었던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들을 추사와 더불어 감상하고 고증하는 기쁨을 나누곤 했었다. 그때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우선은 그의 <은송당집(恩誦堂集)>(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추사는 멀리 제주도에 유배당해 있을 때 우선을 생각하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세한도(歲寒圖)>가 바로 그것이다. 고고한 품격으로 문기 짙은 노송과 초당을 그리면서 지기지우를 생각한 추사의 <세한도>를 서울에서 전해 받은 우선은 감동하였고, 1844년에 청나라에 가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일찍부터 추사를 알고 있던 그곳 명가들에게 보여 절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우선 추사보다 18세 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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