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

문근영 2016. 7. 31. 08:45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



전경


동절기 설경



동쪽면


동문


남쪽면


남문


지정 번호; 사적 64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2 화왕산

지정일; 1963121

시대; 대가야~신라

분류; 성지[성곽]

내용; 화왕산성은 창녕읍의 동쪽 해발 756.6m의 화왕산은 창녕 고을의 진산으로 화왕산(火王山)이라고도 한다. 험준한 북쪽의 바위산을 등지고 남쪽 봉우리 사이의 넓은 부분을 둘러싼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2,600m이다. 현재 동문서문연못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태종실록(太宗實錄)1410(태종 10) 2월에 화왕산성을 위시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요한 산성들을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화왕산 석성(火王山石城)은 둘레가 1,217()이며, 성 안에 샘 9, 3개와 군창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에서 이때에 수축한 성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미 허물어진 성들을 수축한 것이므로 원래의 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려나 신라가 이곳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나 또는 그럴만한 뚜렷한 이유도 없으나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와 이 지역의 많은 고분(古墳)들과 함께 존재하므로 이 산성이 삼국시대 빛벌가야[非火伽倻]의 옛 성이라는 이 지방의 전설은 믿을만하다고 여기고 있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넓게 펼쳐진 곡창 지대의 중심지이며, 서부 경상남도 지방에 대한 교통군사상의 요충지이다. 그러므로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대비하여 빛벌가야가 여기에 견고한 산성을 쌓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성은 성종(成宗) 때 폐성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후 군사상의 요충지이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밀양현풍(玄風)영산(靈山)청도 등의 고을이 이곳에 피난하여 지키면서 왜군이 진주를 통해 전라도 운봉 방향으로 진출하려던 교통로를 차단하였고, 1596(선조 29)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수축하고, 이듬해에 의병장인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이 성을 지키며 내성을 쌓았다고 한다. 곽재우는 이 산성을 본거지로 하여 영남 일대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 두 차례 수리가 되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지정 면적은 226,790[68,725]이다.

  화왕산성의 성벽은 앞뒷면을 다 같이 모난 자연석과 가공석으로 단면 사다리꼴로 쌓았으며, 서 두 곳에 성문을 설치하였다. 서문은 거의 허물어졌으나 동문은 너비 1m, 높이 1.5m 가량의 거석을 세워서 정연하게 쌓은 성문의 개구부(開口部)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그 아래에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시조에 관한 전설이 전하는 작은 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에 있는 못과 샘은 주변의 경관과 함께 신령스럽게 느껴질 정도여서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며, 창녕 조씨의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의 어머니 예향(禮香)이 못에서 영이(靈異)를 받아 그를 탄생했다는 것은 대표적인 전설이다.

특기 사항;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창녕을 보호하는 진산으로 기록된 사실과 영산현풍을 포용하는 성이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의미가 매우 큰 요충지였다.


이야기(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이다.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으로 조계룡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626(진평왕 48)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자가 붉게 씌여져 있었다. 이것을 본 학사는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은 조, 이름은 계룡, 자는 인경(鱗卿)이라 특별히 하사하였다고 한다. 뒤에 부마를 삼음으로써 창성 부원군에 봉해 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 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본관을 창녕으로 하고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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