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둘 상식

[스크랩] 왕인박사 기념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내선일체 음모에 쓰였다

문근영 2016. 6. 20. 05:59

 

왕인박사 기념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내선일체 음모에 쓰였다

도쿄 우에노공원서 헤매다 찾은 왕인박사 기념비 이야기

 

  

 

 

         ▲ 우에노공원 안에 설명 팻말도 없이 외롭게 서 있는 왕인박사기념비

        기념비 앞에는 매화나무를 기린다는 스가와라공(公)의 시구를 적은 팻말이 어울리지 않게 서 있다.

 

 

 

     ▲JR 우에노역(왼쪽)에 내리면 바로 앞에 케세이선(京成線) 우에노역(오른쪽)이 보이며

     그 옆 계단으로 오르면 우에노공원이다.

 

 

보통 “스카이라이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케세이선(京成線)은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 많이 이용하는 열차로 종점은 우에노(上野)역이다. 시내 순환선 JR 우에노역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면 바로 정면에 나리타행 케세이선을 알리는 큼지막한 파란 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을 왼쪽에 두고 십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에노공원에 이른다. 1월 21일 목요일 우에노공원을 찾아간 날은 초봄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시각은 채 10시가 되기 전인데도 산책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 엄마의 모습이 눈에 띈다.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이라 불리는 이곳은 1874년 명치 정부 때 세운 일본 최초의 공원이다. 온시공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궁내청 소속의 땅을 도쿄시에 하사(恩賜, 온시는일본 발음)한데서 유래한다. 공원 내에는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유명한 동물원, 미술관은 물론이고 교토 청수사를 본떠 만들었다는 청수관음당과 몇 개의 신사, 명치유신의 지도자 사이고(西?隆盛) 동상과 야구장 심지어는 시노바즈(不忍池) 보트장까지 있어 공원 구경만도 하루해가 모자랄 만큼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언제나 찾아드는 시민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런 우에노공원과 우리가 관계가 있는 것은 공원 안에 있는 왕인박사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일본의 공원에 왕인박사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왕인박사라면 오사카 일대에 유적지와 기념비가 많은데 도쿄에도 무슨 관련이 있는가 싶어 인터넷을 뒤지던 중 연합뉴스의 2007년 3월 14일 자 기사가 눈에 띄어 반갑게 읽어 보았다.

 

 

  

             ▲ 우에노공원에 벚꽃이 피면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3월 말 일본 도쿄는 벚꽃이 만개해 도시 전체가 핑크빛으로 물들고 사람들은 벚꽃의 향연인 '하나미 축제'에 흠뻑 취한다. 일본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는 예년보다 18일 정도 빨리 개화 시기가 앞당겨져 각지의 공원과 호텔들이 관광객 맞이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공원 내에는 백제시대 왕인박사의 기념비가 있고, 우에노동물원은 일본에서 가장 큰 동물원으로 900여 종, 1만 마리의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인근에는 일본 제일의 명문인 도쿄 대학이 있어 한번 들러볼 만하다. 여행사닷컴(www.good.co.kr)이 주말을 맞아 벚꽃이 만개한 도쿄를 돌아볼 수 있는 4일 상품을 선보인다. 자유여행으로 즐기는 이 상품은 매주 금요일에 출발하며 가격은 41만 8천 원이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활짝 핀 벚꽃 사진 3장과 올라 있는 왕인박사 기념비에 대한 기사는 “빈약하다.”라기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데 재배포금지란다. 우에노동물원의 900여 종 동물을 소개하는 기사보다 못한 왕인박사 그의 위상은 무얼 말해주는 걸까?

 

  

                        ▲ 공원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엔 서양음식점이 있고(위)

                      좀 더 가면 청수관음당이 보이고, 오른쪽 나무들이 있는 곳에

                      왕인박사 기념비가 있다.(아래)

 

 

우에노공원 들머리에서 50걸음 정도를 걸으면 오른쪽으로 계단이 십여 개 있는데 이리 올라가야 왕인 박사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계단 위에 서면 왼쪽으로는 3층짜리 하얀 서양 음식점이 하나 있고, 오른쪽으로는 일본인의 영웅 사이고노다카모리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여기서 오십여 미터 앞으로 가면 청수관음당이 공원 안의 절치고는 제법 크게 자리한다. 그 청수관음당 바로 앞 오십여 미터 지점에 우리의 영웅 “왕인박사” 기념비가 있는데 비바람과 먼지를 뒤집어쓴 어른 키 반만 한 석비는 자칫하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기념비는 모두 두 개가 서 있는데 하나는 상륜부(탑의 머리 부분)가 있고, 하나는 상륜부 없이 윗부분이 둥그스름한 모양의 비이다. 안내판도 없이 서 있는 석비는 언뜻 알아보기도 어렵지만 공원관리실에서 받은 우에노공원 안내도에도 왕인박사 기념비는 표시가 없다.

 

관리실에서 한국인임을 밝히고 “왕인박사 기념비”를 안내도에 그려 넣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부탁에 여직원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간 이내 직접 왕인박사 기념비까지 동행을 하겠다고 따라나선다. “왕인박사 기념비”는 관리실과 오십여 미터 거리에 있는데 시라카와(白川芳子)라고 이름을 밝힌 여직원은 마치 자기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90도 각도로 고개를 수그리며 왕인박사 기념비가 안내도에 빠진 것을 거듭 사과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거기에 한국과 관련된 비가 서 있었던 줄 몰랐다면서 멋쩍어한다.

 

 

          ▲ 우에노공원 지도. 그 어디에도 왕인기념비 표시는 없었다.

          사이고동상 뒤 빨간 점으로 표시한 곳에 왕인기념비가 있다.

          (붉은 표시와 글씨는 글쓴이가 표시해둔 것임)

 

 

“왕인박사가 누군 줄 아십니까?” 일행 중 한 명이 묻자 여직원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당황해 했다. “잘 모르겠는데 왕인박사란 누구시죠?”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에 다혈질인 역사전공의 한 회원이 유창한 일본어로 왕인 박사와 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하자 그때야 “아, 맞아요, 배운 것 같아요, 일본에 학문을 전해준 백제의 와니 박사님….” 일본에서 왕인은 “와니”로 통한다. 시라가와씨는 왕인박사 기념비가 우에노공원 안내도에 빠진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하면서 1년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안내도에는 반드시 넣을 수 있도록 관장에게 말하겠다고 하면서 기념사진도 같이 찍었다.

 

그렇다면, 우에노공원에 왕인박사 기념비를 세운 이는 누구일까?

 

《도쿄 속의 조선, 東京の中の朝鮮, 高柳俊南, 明石書店, 1996》에 소개된 왕인박사 기념비에 대한 유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에노공원 사이고노 다카모리 동상에서 오십여 미터 거리 안쪽에 <왕인비>가 있습니다. 왕인은 4세기 말에 백제에서 도래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로 처음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도래(渡來)씨 계족인 서문(西文)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1939년 일입니다. 태평양 전쟁 직전의 이 시기에 왜 이와 같은 고대의 전설적인 인물비가 세워진 것일까요? 당시 중국침략 수행을 위해 식민지였던 조선을 철저히 이용하려고 한 일본 정부는 <내선일체> 곧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조선문화를 철저히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일본에 <귀화>한 것을 <내선일체>의 구실로 삼았습니다. 왕인은 그 상징적인 인물로 이용된 것이지요.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이 비가 세워졌던 것은 이 비의 뒷면에 발기인 중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지로(南次郞.1874 ~1955)를 비롯한 일본의 조선 침략 중심인물이 몇 명인가 포함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해서 우에노공원에 왕인박사 기념비가 세워진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인데 이 책을 쓴 사람들은 일본인이다. 이들은 "도쿄 재일한국·조선인학생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임”이란 다소 긴 이름의 단체 회원으로 도쿄도립고등학교 교사인 아라이(新井精) 씨를 비롯하여 14명이 각 분야를 나눠 이 책을 만들었다. 주로 교사 중심으로 이뤄진 집필진은 말하자면 “일본 속의 한국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모임”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우에노공원의 왕인박사 비가 “내선일체 도구”로 세워졌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란 극우화 되어 가는 일본사회에서 몰매 맞을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용기있는 일이지만 아쉬운 것은 왕인박사를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른바 친한(親韓) 인사들의 한계를 여기서도 보게 되어 다소 씁쓸한데 다만 이들의 활동은 일본의 양심임이 분명하다.

 

  

               ▲ 우에노공원 두 개의 왕인박사기념비. 왼쪽 비(1941)보다 오른쪽의 상륜부가

              있는 비(1940)가 먼저 세워졌으며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에 이용했다.

 

 

이 책에서는 기념비가 세워진 것을 1939년이라고 했는데 실제 우에노공원에 세워진 것은 1940년과 1941년이다. 비문의 내용 등 자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귀국한 뒤 관리사무소에 국제전화로 문의한 결과 비문 내용은 관리사무소에서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소화 15년(1940)과 소화 16년(1941)에 세워졌다고 관리소 직원 가와이(河合) 씨는 답변해 주었다. 상륜부가 있는 비문이 먼저 세워졌고 그 옆에 것이 나중에 세워진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자세한 것은 자기들도 자료가 없어 모른다고 했다.

 

1939년이라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하던 상황에서 전쟁야욕에 광분하던 시대이며 미나미(南次郞) 총독은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전쟁의 흔적을 돌에 새기느라 여념이 없던 인물이다. 1939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기념해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인왕산 암벽에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도 미나미 총독이라고 이순우씨는《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에서 밝혔다.

 

무엇이든 돌에 새기면 영원히 남는다. 그러나 영원히 남는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미나미와 일본 제국주의는 백제 왕인박사마저 <내선일체>의 도구로 이용했으며 70여 년간이나 우에노공원의 침침한 나무 숲 사이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간 동안 왕인박사를 외롭게 서 계시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이 돌에 새긴 왕인박사 기념비는 일본 제국주의의 흉악함을 오히려 드러낼 뿐이다.

 

“기념은 하되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졌거나 억지 춘향인 것은 비단 왕인 박사 기념비만이 아니다.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수많은 조선인의 영혼 역시 하기 좋은 말로 “제사”를 모시는 것일 뿐 실상은 “합사”를 반대하고 하루속히 고국의 품으로 돌려주기를 바라는 우리 쪽 유족의 뜻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왕인박사”를 기념하려면 적어도 비석 앞을 떡 하니 가로막는 매화나무를 기린다는 스가와라공(公)의 시구를 적은 팻말을 치우고 대신 왕인박사기념비가 이곳에 놓이게 된 경위를 솔직히 적는 것은 물론 아울러 사과의 글도 실어야 한다. 또한, 내년에 새로 만들어지는 우에노공원의 안내도에는 왕인박사기념비가 당당히 표시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벚꽃놀이에 파묻혀 셔터 누르기에 바쁜 오늘의 일본인들의 무지한 역사의식을 일깨우게 되고 우리 국민 역시 도쿄 관광코스에 빠지지 않고 들리는 우에노공원 관광의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에노공원의 벚꽃은 피리라! 꽃을 즐기는 민족이라면 그 고운 마음씨로 왕인박사 기념비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고 비문도 먼지를 털고 말끔한 모습으로 바꿔놓아야 한다. “잘못 의도”된 기념비 건립에 대한 사과의 유효기간은 아직 남아있다. 우에노공원의 조처를 기대해본다.

 

 

글쓴이: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rhsls645@hanmail.net)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pine4808@paran.com)

 

 

출처 :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글쓴이 : 김영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