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샤파 연필깎이 / 심재휘

문근영 2016. 5. 7. 08:20

 

샤파 연필깎이

 

   심재휘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이다

열여섯을 앓고 있는 딸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아직은 식지 않은 여름밤에

선풍기는 소리 없이 돌고

나는 연필깎이로 샤파 샤파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어둠 속에다 무엇을 쓰려는 걸까

선풍기는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하고

나는 연필깎이를 적당히

정말 적당하게 힘을 주어 돌리는 오래된 손

아빠의 달은 창밖을 공전하고

딸의 별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이 넓은 우주에서

샤파 샤파 아프게 깎고 깎이는 연필의 밤

셀 수 없는 몇 자루의 밤을 몸 안에 품고 오늘은 딸이 운다

그럴 때면 나는 뭉툭하고 눈물이 그렁한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고

길고 까만 심이 나오도록 손잡이를 돌리는데

살살 돌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나의 손에는

얇고 구불구불한 눈물의 밥만 가득한데

연필의 內心이 제법 뾰족해져도 나에게는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

서글픈 딸의 봄밤은 작고 가지런한 그녀의 발등 위로

수식어도 없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

 

 

 

                        —《딩아돌하》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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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1963년 강릉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졸업. 1997년 《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그늘』. 현재 대진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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