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대구 파계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把溪寺 乾漆 觀音菩薩 坐像) 및 복장 유물(腹藏遺物)

문근영 2016. 1. 22. 05:23

대구 파계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把溪寺 乾漆 觀音菩薩 坐像)

복장 유물(腹藏遺物)




건칠 관음보살 좌상이 봉안된 원통전


지정 번호; 보물 992

소재지; 대구광역시 중구 파계로 741(중대동 7) 팔공산 파계사 원통전

지정일; 1989410

시대; 조선 세종 29(1447) 중수

분류; 목조 불상

내용; 중구 중대동의 팔공산(八公山)에 위치한 파계사 원통전에 유리상자로 씌워져 단독으로 봉안된 전체 높이 108.1의 관음보살 좌상이다. 파계사는 804(통일신라 애장왕 5)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세운 사찰이다. 복장 발원문(腹藏發願文)에 의하면 1447(세종 29)에 이 보살상을 중수한다고 적혀 있어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다. 특히 고려 후기 불상 계열을 다른 전통적인 불상의 특징과 함께 신체가 장대(長大)한 면을 보이는 유형의 보살상에 속한다.

  대구 파계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은 허리가 길고 얼굴을 들고 바로 앉은 상현좌(裳懸坐)의 자세로 꽃무늬 등을 정교하게 붙인 3중의 높은 보관(寶冠)이 묵중하다. 촘촘히 연주(連珠)를 두른 관대(冠帶) 밑에는 정연한 보발(寶髮)이 보이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칼은 몇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원만한 얼굴, 눈썹 사이의 백호(白毫), 약간 짧은 듯한 귀는 모두 조화로우며 목에 표현된 삼도(三道)는 그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쪽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외장(外掌) 하고 있으며, 왼손은 약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법의(法衣)와 비슷한 착의법으로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으면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점이라든가, 가슴과 양쪽 팔, 무릎 등 전신을 감싼 화려한 영락(瓔珞) 장식, 무릎 밑에 보이는 고식(古式)의 파상의문(波狀衣紋) 등에서 앞 시대의 영향이 엿보인다.

감상 포인트; 근엄한 표정, 두터운 옷, 손 모양, 가슴 위로 올라온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고정시킨 것 등은 영덕 장륙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보물 993)과 비슷하며, 1464(세조 10)경 제작된 원각사탑 부조상이나 1476(성종 7)에 제작된 무위사 아미타 3존 벽화 본존과도 비교된다. 고려 후기 불상의 전통적인 특징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상투를 튼 스님); 조선 정조 중엽. 배불 정책이 극심하여 전국의 절마다 스님들은 부역 아니면 궁중에서 쓰는 종이와 노끈 미투리 등을 삼느라 혹사당했다. “, 이래서야 어디 수도승이라고 할 수 있겠나.” 스님들의 푸념은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대구에서 서북쪽으로 약 50리 거리에 위치한 팔공산(해발 1192m) 자락의 천 년 고찰 파계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지 스님, 오늘 삭발하실 날입니다.”, “안 깎는다.” 파계사 주지 현응(玄應) 스님은 시자가 준비해 온 삭도를 쳐다보지 않은 채 한마디로 물리고 말았다. 시자는 자못 궁금했다. “스님, 어디 편치 않으신지요?”, “아니다.”, “그럼 왜.”, “그럴 일이 있느니라.” 정갈하기로 소문난 현응 스님이 한 철이 지나도록 삭발을 하지 않자 절 안의 대중들은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던 스님은 어느 날 짧게 기른 머리로 솔잎상투를 틀었다. 또 승복을 속복으로 갈아입고는 길 떠날 채비를 했다. 놀란 시자가 달려와 물었다. “스님! 웬일이십니까? 이 길로 환속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예끼 이 녀석.”, “스님, 그럼 머리는 왜 길렀으며, 옷은 왜 속복으로 갈아입으셨는지 속 시원히 사연을 들려주십시오.”, “그래 말해주마. 그 동안 미투리 삼고 종이 만드는 일은 참고 견디었으나 젊은 유생들의 행패는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구나. 그래서 내 이렇게 변장을 하고 상경하여 조정에 탄원을 할 것이니라.” 승려의 신분을 속이고 겨우 한양으로 들어간 현응 스님은 어느 밥집의 잔심부름을 하며 탄원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스님은 때를 얻지 못했다. 그만 파계사로 발길을 돌리기로 결심하던 날 밤. 스님은 숭례문(국보 1) 근처 주막방에서 한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냈다. 그 날 밤 정조 임금은 숭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참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한 정조는 내관을 시켜 숭례문 근처를 살피게 했다. 어명을 받아 아침 일찍 숭례문 근처로 나아가 인근을 살피던 내관은 행장을 꾸려 막 길을 떠나려는 현응 스님과 마주쳤다. 비록 행색은 남루하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인품이 달라 보여 내관은 현응 스님을 은밀히 어전으로 안내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고?”, “용파(龍坡, 당시 현응 스님의 법명은 용파였고 현응은 뒷날 내린 시호)라 하옵니다.”, “무슨 용자를 쓰느냐?”, “용 용()자입니다.” 정조는 범상치 않은 인품에다 용()자 이름을 지닌 현응 스님의 신상을 상세히 물었다. 현응 스님 역시 절호의 기회다 싶어 자신의 신분과 사찰 실정을 밝히면서 불교 탄압을 탄원했다.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렇게 불교를 탄압하게 되면 나라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정조는 현응 스님의 간곡하면서도 강력한 청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 그대의 청을 들어줄 테니 그 대신 태자를 얻게 해줄 것을 부탁하오.” 현응 스님은 그 길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삼각산(三角山) 금성암의 농산(聾山) 스님과 함께 세자 잉태를 기원하는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현응 스님은 수락산(水洛山) 내원암(內院庵;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서 농산 스님은 삼각산에서 기도하였으나 태자 잉태의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기도를 회향한 두 스님은 똑같이 정조의 사주에 세자가 있지 않음을 말했다. 그때였다. “여보게, 자네가 세자로 태어나게.” 현응 스님은 농산 스님에게 진지하게 권했다. 농산 스님은 어느 날 밤 수빈 박씨의 꿈에 나타난 뒤 태자로 환생했으니 그가 바로 1800년부터 34년 동안 재위한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대왕이다. 태자를 얻은 정조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은 용파 스님에게 현응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사의 큰 은혜 내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소. 이제부터 파계사를 중심으로 40리에 걸쳐 나라에서 거두던 세금을 모두 절에서 거둬들이도록 하오.” 정조는 성은을 베풀었으나 현응 스님은 이를 거절하였다. “소승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세금을 절에서 거두어 정재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오니, 대신 경내에 선대 임금님의 위패를 모시도록 윤허하여 주옵소서.” 임금은 쾌히 윤허했다. 현응 스님은 즉시 파계사로 내려가 기영각을 세우고 선대 왕의 위패를 모시니 지방 유생과 양반의 행패는 자연 끊어지게 되었다. 현재 사적비 부근에 있는 大小人皆下馬碑(대소인개하마비)’는 그때 새겨진 비다. 현응 스님이 건립하고 그곳에서 수도했다는 성전암(聖殿庵) 가는 길목엔 현응 스님의 승탑이 서 있다. 또 성전암에는 현응대사의 영정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전생에 농산 스님이었던 순조대왕이 11세에 썼다는 玄應殿(현응전)’이란 편액이 지금까지 성전암 법당에 걸려 있어 인과와 업 그리고 윤회의 질서를 보게 한다. 내원암의 사적에 두 분 스님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이 남아있어 이 이야기를 전한다. 지금도 금선사에는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모시고 있다. 804(통일신라 애장왕 5)에 심지왕사(心地王師)에 의해 창건된 파계사는 1605(선조 38) 계관 스님이 중창했고 이어 현응대사가 1695(숙종 21) 삼창했다. ‘파계사란 이름은 절 좌우 계곡에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흩어지지 못하게 잡아 모은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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