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Simon Bolivar, 1783-1830)
시몬 볼리바르는 산 마르틴과 함께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이며, 라틴아메리카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볼리바르는 300여 년간의 스페인 식민지배를 받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국을 해방시켰다. 볼리비아라는 나라 이름은 볼리바르를 기념해서 명명된 것이다.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등 남미 남부를 해방시켰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7월 24일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개방적인 도시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광대한 농장과 노예를 재산으로 상속받아 동생 후안 비센테, 그리고 두 명의 누이와 함께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다. 볼리바르의 스승은 시몬 로드리게스와 안드레스 베요로, 그 중 로드리게스는 루소의 추종자였다.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그는 자유와 정의, 기본권 사상 등 유럽의 선진적인 시민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가 17세 되던 1799년에 할아버지가 죽자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난다. 카를로스 4세 치하의 스페인 귀족사회는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부유한 볼리바르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우스타리스의 집에서 기거하며 외국어, 수학, 무용, 승마, 역사 등을 배우며, 그 무렵 우스타리스의 조카딸인 마리아 테레사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1802년 19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카라카스로 함께 귀국한 마리아 테레사는 결혼한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볼리바르는 그후 죽을 때까지 혼자 지냈다.
볼리바르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파리에서 보낸 3년 반 동안 아내의 죽음에 절망하여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 옛 스승 로드리게스를 다시 만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철학과 정치학, 특히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 서구 시민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던 인물들의 저서를 읽으며, 세계정세와 새로운 정치사상을 접한다. 볼리바르는 프랑스 혁명사상에 심취한다. 1805년 로드리게스와 함께 로마를 여행한 볼리바르는 "나 자신의 명예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의 마음과 나의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끊을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라며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한 결의를 다진다.
어찌 되었든 그 당시 미국의 독립은 같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이주민으로서 라틴아메리카인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에 크게 고무된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통치의 근거를 피통치자들의 동의에서 비롯된다는 사회계약론을 비롯한 유럽의 계몽사상을 일종의 복음처럼 받아들였다. 주권재민, 인권, 국가의 독립과 같은 개념은 현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왕권신수설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17,8세기의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러한 개념들은 완전히 새로운 개혁사상이고 혁명적인 기운이었다. 스페인 본국은 이런 사상의 식민지 유입을 막기 위해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금서로 규정한다. 그러나 한번 불붙기 시작한 독립의 희망은 라틴아메리카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아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스페인의 본토우선주의, 중상주의 정책은 식민지 태생의 많은 크리오요(criollo:식민지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들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스페인 왕실의 개인금고처럼 여겼고, 본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식민지로 수입되는 외국의 물산에 대해 높은 관세 정책을 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상품 중 본국의 상품과 경쟁이 될만한 것들은 생산을 중지시켰다. 그런 이유로 스페인은 1595년부터 아메리카에서의 포도 재배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스페인 본국의 포도주와의 경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본국의 이런 태도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살아야 하는 크리오요들에겐 절망적인 것이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각성한 식민지인들에게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모순된 체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데다 스페인 본국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경쟁력이 높은 상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틴아메리카 시장에 진입할 수 없던 영국도 식민지인들을 지원했다. 볼리바르 역시 처음에 영국의 힘을 빌어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라틴아메리카의 독자적인 힘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1810년 미란다의 지휘하에 <애국의회>를 만들고, 1811년 7월 5일 독립을 선포했다.
당시 60세의 미란다는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볼리바르는 대령의 신분으로 발렌시아 전투에 참가한다. 혁명군은 스페인 왕실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지진으로 인해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1812년 볼리바르는 <카르타헤나 선언>을 발표하고 새롭게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1811년 제1공화국의 실패 원인을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포용정책에 있었다고 생각하여 독립투쟁에 있어서 느슨한 연방제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던 이념가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특정 지역도, 특정 국가도 아닌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독립을 역설했다.
독립운동 진영 내부를 재정비한 후 벌어진 1813년 5월 이후의 전투에서 그는 승리했다. 그는 전투에서 훌륭한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드러냈고, "정당한 대의를 위해서 압정에 맞서 싸우지 않는 스페인인은 어느 누구라도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여! 죽음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아메리카 해방을 지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사람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독립에 대해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다른 식민지 크리오요들을 다그쳤다. 이 선언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사실 중 한 가지는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나 해방에는 원주민들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는 것과 아직까지는 스스로를 스페인인이라고 지칭하는 수준의 인식을 보인 점이다.
그러나 어쨌든 볼리바르는 그때까지 스페인의 압제에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모르던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투쟁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그는 1813년 8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카라카스에 입성했고, 사람들은 그를 '해방자'라는 칭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볼리바르는 이외에 '군 총사령관', '최고원수', '공화국 대통령' 등 많은 칭호를 받았지만, 그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해방자'였다.
1815년 그는 스페인 왕실군에게 패 하여 자메이카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메이카의 편지>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그 저서에는 해방자 볼리바르의 정치적 식견과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것을 분석했다. 라틴아메리카가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로 식민지인들의 정치 교육 부재와 크리오요들의 수동적 태도,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이라고 지적하며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또한 그 자신 하나의 라틴아메리카 건설이라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라틴아메리카가 결국 여러 나라로 조각날 것을 예견하기도 했다.
볼리바르는 1817년 카우디요 파에스 장군의 군대와 5천여 명에 이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지원병을 합해 새롭게 독립투쟁을 시작한다. 1819년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오리코코의 우편>을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선전과 계몽의 도구로 쓰였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들의 정체성, 라틴아메리카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인이란 정체성을 벗고 라틴아메리카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는 "우리는 인디오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인도 아니다. 우리는 원주민과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중간 인종이다."라고 했다.
1819년 5월 볼리바르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해 12월 콜롬비아 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어 1822년 키토(현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고 이를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통합시켰다.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킨 후 볼리바르는 페루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했으며, 1822년 남미 해방의 두 영웅인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은 에콰도르의 과야킬 항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단독 회담을 했고, 회담 결과 산 마르틴은 페루 해방을 볼리바르에게 양보하고 돌아갔다. 회담 내용에 대해서는 두 사람 이외에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공적이나 권력을 놓고 다투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두 영웅은 아무런 유혈사태 없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란 대의에 충실히 복무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 큰 견해차를 보였다. 산 마르틴이 사회혁명을 우려하여 왕실을 유지한 채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한 독립을 원한 반면, 볼리바르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새로운 공화국 수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는 하나로 통일된 라틴아메리카를 원했고,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북부지역에서만큼은 '그란 콜롬비아'를 통해 그런 통일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가 중남미의 통합을 원했던 것은 미국이 하나의 연방으로 커가고 있는데 라틴아메리카가 분열될 경우엔 결국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볼리바르는 그러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1825년 아메리카 국가들간 최초의 모임인 <아메리카 회의>를 당시 콜롬비아의 영토였던 파나마 시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은 지리적 소통의 어려움과 국가간의 서로 다른 인종 혼혈, 지역간 대립, 그리고 무엇보다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을 원치 않았던 미국과 영국의 분열정책으로 결국 20여 개 국가로 분열되고 만다. 그는 칠레만이 민주적인 방법의 통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의 이런 예측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집권할 때까지도 이어졌지만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828년 신생 독립국가들의 통합을 꿈꾸었던 볼리바르는 오히려 그를 죽이려는 음모에 맞닥뜨리게 된다. 1830년 4월 27일 공화국내 반란세력들을 제어하는 데 지치고 힘이 다한 볼리바르는 더 이상의 권력을 포기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좌절했다.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투쟁에 몸을 던진 이래 20년간 한편으로는 전쟁터를 떠돌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틴아메리카의 헌법을 기초했다.
"우리들은 혁명을 위해서 몸바치는 동안 배울 시간이 없었다." 20년간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몸바쳤던 볼리바르가 좌절과 고통의 회한 속에서 남긴 말이다. 같은 해 12월 17일 모든 희망을 상실한 시몬 볼리바르는 산타 마르타의 침상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구술하도록 했다. "아메리카는 이제 통치가 불가능하다.……마치 혁명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바다를 경작하는 것처럼 …."
그의 이상이었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통합의 정신은 1889년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의해 종말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ek. 하나로 통합된 라틴아메리카의 이상은 그렇게 사라져 간 것이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퍼와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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