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성덕왕릉(聖德王陵)

문근영 2015. 6. 18. 05:55

경주 성덕왕릉(聖德王陵)



전경


근경


전면





호석 세부


호석


12지신상


12지신상


문인석과 석수


문인석(동쪽)


후편 석수(서쪽)


석수


능비 귀부


지정 번호; 사적 28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지정일; 1963121

시대; 통일신라 성덕왕

분류;

내용; 경주 성덕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佛國寺) 방향으로 가는 4번 국도의 동남쪽 구릉으로 경주시 조양동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33대 임금 성덕왕(재위 702~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본명이 김륭기(金隆基)이고, 신문왕(神文王)의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동생이다.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능의 석조물 배치 양식도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덕왕의 재위 기간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37(통일신라 성덕왕 36) 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현재 왕릉 북쪽에는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고, 넘어진 석탑이 전하고 있다. 현재 국립 경주박물관에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성덕대왕 신종(국보 29)이 보존되어 있다. 이 능 서쪽으로는 성덕왕의 형인 효소왕릉(사적 184)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있다. 지정 면적은 11,174[3,386]이다.

  성덕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신라 최초로 완비된 왕릉 제도를 갖추고 있다. 무덤 하부에 두른 호석(護石; 둘레돌)신문왕릉(사적 181)의 호석 구조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정도의 판석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개석(蓋石; 덮개돌)인 갑석(甲石)을 올렸다. 면석들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주(撑柱)를 끼워 고정시켰고, 그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이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둥근 형태의 12지신상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사각형 기단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나 심하게 파손 당하였다. 호석 밖으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석주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난간의 석주에는 상하 2개소의 관석(貫石)을 끼우기 위한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무덤 앞에는 안상(眼象; 눈 모양의 장식)무늬가 새겨진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문인석 2, 무인석 2구를 마주 대하게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파손이 심하여 무인석 1구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 1구밖에 남지 않았다. 능 뒤쪽 좌우에 1구씩, 그리고 능 전면 석인들 앞 좌우에 1구씩 모두 4구의 석사자가 배치되었는데 자세, 안면, 체모(體毛) 등이 매우 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덤 전면 좌측에 능비(陵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비신(碑身)과 이수(螭首; 머릿돌)가 없어지고, 목이 부러진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는 비교적 웅대한 편이나 몸체가 납작하고 귀갑문(龜甲文)의 조각도 힘차지 못하다. 능비(陵碑)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판독된 명문은 ()’()’, ‘()’, ‘()’, ‘()’자 등이다. 향후에 더 많은 비석 조각들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최근엔 파괴된 무신석의 몸통으로 추정되는 석괴까지도 나타났다.

특기 사항;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 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무덤 앞에 거대한 귀부와 남아 있는 문신석 등이 성덕왕릉으로 추정케 하는 근거도 된다. 아울러 선덕여왕릉(사적 182), 태종 무열왕릉(사적 20), 흥덕왕릉(사적 30), 경순왕릉(사적 244)과 더불어 신라 고분 중에서 피장자(被葬者)가 확실한 능묘이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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