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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등대 / 정금희 (일반부 당선자)
그것은 선명한 결을 잘 익힌 맛이다 나의 하얀 말도 새벽 바다 동쪽 하늘을 잡아당긴다 잡아당겨도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 어린 바다 뿌리를 이리저리 파 본다 바위 속에서 물의 보푸라기를 잡는다 그 보푸라기를 비벼 차를 끓이면 주전자 속에 끓어오르는 물의 시간 폭포소리가 보인다 소나무 송진향이 보인다 잠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온다 고향의 뿌리를 천천히 잡아당긴다 새벽 닭 울음 먼 빛의 진동소리가 보인다 그 맛이 뾰족뾰족하다
D-day / 송혜경 (학생부 당선자)
열 뚜우ㅡ시! 요 귀여운 꼬마아가씨가 여태 잠을 안자고 내게 시간을 알린다.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화면구석에 메모 하나가 얄밉게도 내게 오늘의 일정을 알린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 아래 검은 그림자가 내 얼굴을 집어 삼킨다. 잔잔한 여드름이 뚫고 올라와 자리한다.
책상을 살펴본다. 구김 없이 빳빳한 문제집이 나를 얄밉게 쏘아본다. 다 듣지 못한 동영상 강의가 자장가를 불러준다.
내일을 위해, 아니 오늘을 위해 이제 그만 따뜻하게 데워진 전기장판으로 달려가 그간 매고 다니던 피곤을 내려놓고 싶다.
한ㅡ시! 잠 좀 자라, 꼬마아가씨야!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구석에 메모 하나가 얄밉게도 내게 오늘의 일정을 알린다.
오늘의 일정 : 중간고사 D-day.
[심사평 - 일반부]
삶의 이력, 우리 생의 아름다운 집 한 채
2011년 뉴스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는 전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작품을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267편에 이르는 응모작을 윤독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우리의 민족문학인 시조에 대한 열정이, 바다 건너 탐라까지 불꽃처럼 타올랐기 때문이다.
제주지역 신춘문예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응모하신 많은 분들이 제주의 정서를 작품에 펼쳐 보였다. ‘해녀, 용두암, 오름, 서귀포, 우도’ 등이다. 작품을 무리하게 이끌고 가느라 그러한 시적 주제들이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발견한 소재들을 긴강감 있게 끌고 가는 응모작들이 눈에 띄었다. 감상을 진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치밀한 묘사와 관찰로 새로운 감흥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최종심에 오른 임태진의 「제비집」, 이창선의 「섶섬」,오창래의 「우도 생각」, 문제완의 「石衣, 바위가 옷을 입다」, 백점례의 「물의 길은 희다」가 올라왔다.
「우도 생각」은 우도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절규로 중첩시키면서 시적 발상을 전환하였으나, 언어를 함축시키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石衣, 바위가 옷을 입다」는 4수로 이끌면서 시적 전개는 무리가 없었으나 부분 부분을 설명으로 처리해 전달의 힘이 약했다.「물의 길은 희다」는 시조를 다루는 부드러움의 힘은 앞섰으나 주제를 살리지 못해 난해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태진의 「제비집」과 이창선의 「섶섬」으로 압축되었다. 이창선의「섶섬」은 나뭇잎 섬으로 귀결하면서 그 풍경을 서귀포와 연결, 전개한 사유의 힘이 있었다. 예컨대 임태진이 다른 작품 「화재주의보」연작에서 보여준 삶의 비명과 탄식처럼. 그러나 「제비집」에서 사글세의 남루한 살림과 삶의 여정을 이입해 특히 “해마다 삶의 이력에 둥지를 틀고 산다”에서 볼 수 있듯이 춥고 가난한 우리 생의 아름다운 풍경과 서정의 밀도를 더 높이 평가했다.
심사 결과, 당선작으로 임태진의 「제비집」을 뽑았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서정을 펼쳐 시조문학의 재목이 되기를 바란다. 끝까지 남으신 분들의 작품에도 깊은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이번 계기로 도약의 시간을 갖도록 부탁드린다.
심사 : 이승은 · 박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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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사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심사평]
선명한 묘사, 참신한 비유 돋보여
13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한 편의 뛰어난 시를 고르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다. 오랜 수련과 고뇌를 거쳐 생산되었을 다기한 사연의 시들은 그 부피와 다양성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의 눈을 확 트이게 하는 작품은 쉬 찾아지질 않았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수준급의 기량과 언어의 진정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다른 응모작들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시편들로 우종태씨의 '대패질'외 2편,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외 2편, 고경숙씨의 '고사목'외 3편을 최종적으로 선별해놓고 고심을 했다.
우종태씨의 경우 오랜 습작을 거친 분답게 시를 끌어가는 저력과 안정된 짜임이 돋보였지만 뒷심이 조금 딸리는 듯했다.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는 묘사와 진술능력이 뛰어나고 이야기의 전달도 뚜렷했지만, 다른 작품들이 그에 상응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고경숙씨는 언어를 다루는 재치가 상당해보였다. 묘사의 선명성이나 비유의 참신함에 위트까지 두루 갖췄고 리듬에 대한 고려도 엿보인다. 그러나 재치가 승해서일까, 가끔씩 어휘가 시적 맥락 안에서의 조화를 잃고 튀는 흠결이 있었다. 나름대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근본 명제를 들어 우리는 최종적으로 고경숙씨의 '고사목'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외에도 한교만, 안은주, 백명희, 이경옥 제씨의 작품들도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음을 밝혀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와 함께 지속적인 정진을 부탁드린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 있으라! <김승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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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 이 명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불교신문 2685호/ 1월1일자]
[당선소감]
천의무봉을 꿈꾸며
뜨거웠던 지난 여름 어느 날, 매미가 밤을 새워 방충망에 매달려 울었다. 매미의 눈에는 밤새 흘린 눈물의 흔적이 하얗게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매미가 몸을 흔들고 날개를 퍼덕였다. 춤을 추는 듯했다.
사르나트에서 사정없이 내리치던 죽비를 얻어맞은 교진여의 영혼처럼 울음 울던 참매미의 갑작스런 춤사위에서 매미의 깨달음이 보였다. 그렇구나, 그 동안 나는 나를 들여다 본 세월이 없었구나. 그리고 어디에서라도 진실로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었구나. 나는 비로소 정면으로 내 앞에 서 보았다. 시를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나는 ‘내 껍데기’와 싸웠을 뿐이었다. 서서히 나를 알아가는 순간,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시에 눈 뜸이 내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어 주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윤회와 밝음과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눈에 보이지 않던 미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는 내게 그렇게 한 세상을 열어 주었다. 2년여의 짧은 시 공부에서 나는 순수의 하늘과 바다와 들녘을 누비며 자연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습작에만 열중했다. 그것은 내 삶에 주어진 최초의 자유였다.
지금 이 순간, 시를 지도해 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님이지만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상을 어머님의 영전에 바친다. [심사평]
잘 익은 말의 빛깔
아침의 언어는 언제나 눈부시다. 신춘문예의 벽을 넘기 위해 오래고 먼 모국어의 장강을 거슬러 올라온 신인조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소리와 뜻을 절정으로 뽑아낸 시, 시조는 더욱 그렇다. 시조가 우리의 전통시인 터에 굳이 자유시와 나뉘일 까닭이 있을까마는 지금까지의 현상은 분리해서 공모를 했었는데 불교신문의 경우는 시라는 큰 틀 속에 묶은 것이다.
총 310인의 응모자에 편수로 10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대체로 시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가고 있으며 시 경작을 하는 후보층이 두텁다는 것이었다. 다만 시행지가 주는 종교적 선입견 때문인지 불교적 소재나 주제의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많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감점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식적인 필요는 없어야 할 일이다.
어렵게 가려낸 결과 ‘분천동본가입납’ ‘순천만의 저녁’ ‘소금꽃’ ‘돌탑을 쌓으며’ ‘대숲이 있는 항아리’를 최종심에 올려놓고 저울의 눈금재기를 해서 ‘분천동본가입납’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도 예술의 한 양식인 이상 시대적 패러다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해 특히 신인들이 좇아가는 시의 흐름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선작 ‘분천동본가입납’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어메의 젖”과 만나는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을 살고 잇는” 정경들이 크게 꾸미지도 않으면서 깊고 은은한 가락으로 펼쳐진다. 다시 아기가 되는 화자와 어메와의 해후가 “…니더”의 화법으로 전해주는 잘 익은 말의 빛깔이 오래 묵은 향기로 피어난다. 함께 보내온 ‘추사가 보내온 저녁’이 작품을 끌어올리는 밑밭침이 되었음을 덧붙인다. 더욱 큰 성과있으시기를 빈다. / 이근배 시인
2011년 신춘 '무등문예' 시 당선작
외출을 벗다 / 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벋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장요원 시인 (본명 : 장혜원) 순천 출생. 동신대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당선소감]
공허한 마음들 포만에 닿길
당선소식이 오던 오후를 눈송이가 촘촘히 메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일 또한 허공을 메우는 일입니다. 각을 세워 허공 한 채를 짓고 또 한 채를 짓고 나면 다시 허공이 들어서지요. 제가 건축하는 詩로 인하야 빽빽한 오늘을 살아가는 공허한 마음들이 포만에 닿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정보다 시를 더 사랑하는 아내를, 엄마를 묵묵히 지켜주는 남편과 아들 딸에게 영광 돌립니다. 늘 힘이 되어준 명린 언니, 정애 언니, 현웅 시인께 감사드리며, 배 아파도 당선됐으면 좋겠다던 친구 황정숙, 서화 시인님, 기홍 시인, 현주 언니, 명희 언니 그리고 시마패, 큐브 님들을 겸연쩍은 마음으로 불러봅니다.
부족한 저를 세워주신 무등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20년 역사의 신춘무등문예는 가히 전국적인 위상을 구가하는 듯 보였다. 풋풋함의 기척들이 채 가시지 않은 십대들의 투고작에서부터 멀리 해외 이민자에 이르기까지 원고들이 걸어온 주소지는 경향각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천 여편에 이르는 투고작들에게서 아직은 기척같은 시의 유용성을 감지하는 일만으로 선자는 잠시 기꺼워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곧 '한 편의 시'를 찾아나서는 고통의 축제는 시작된다.
순간마다의 갸우뚱거림과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6명의 작품이 남았다. 어쩌면 그렇게 줄여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민달팽이'외 4편을 투고한 정순의 작품에서는 타자들에 비해 튼실한 시적 문장의 안정감이 짚혀졌다. 그러나 문제는 5작품 모두가 동어반복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좀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은 시안(詩眼)과 보폭으로 그의 시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었다.
'화장터 가는 길'외 3편을 낸 박다영은 표제시의 수준을 다른 작품들이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막의 오후 세 시는 당신이 가루가 되기 적당한 온도" 등에서 보이는 고투의 언어를 통해 미지의 그의 시의 기미가 짐작됐다.
'거울을 마주한 이상'외 2편의 서경에게서도 지난한 습작기를 거쳐온 노회한 문장들이 읽힌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서도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발자국에 빠지다'외 3편을 낸 유시은의 시는 한편으로 기성에 가까웠다. 여기 '풀밭'인 경연장에서 그의 시는 자연히 불리했다.
'전어'외 3편을 응모한 김정애와 '바람의 고삐'외 2편을 낸 장요원의 작품이 남겨졌다.
김정애의, '전어'가 올려진 아버지의 밥상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양철밥상'이다. "젓가락 끝을 맞추려는지" "탕 탕" 양철북 소리를 낸다는 바라봄만으로, 실상(實想)이 시가 되는 지점을 간파한 듯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시 역시 '그늘'을 거느린 완성된 시력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세 편의 투고작이 고른 수준에 올라 있는 장요원의 시 '외출을 벗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는 '스타킹'의 환치는 비교적 젊고 튼튼하게 읽혔다. 한 편으로 어딘지 수사와 외피에 조율하는 듯 여겨지는 그의 시업의 미래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 '깊이'의 모서리를 체득하는 일에 한동안 복무해야할 것으로 비쳐졌다.
당선자의 장도가 보다 원대하고도 높이 있는 영토에 거뜬히 안착하기를 바란다
심사 : 정윤천(시인)
2011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당선소감]
"문 밖 지천인 詩의 몸들, 찾아나설 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는 듯, 모월 모일 일요일 오전 열시는 맑고 고요하다.
오랜만에 들른 옛집, 아흔에 접어든 아버지의 숨소리도 깃털처럼 가볍다. 나는 지금 애벌레처럼 잠든 아버지 옆에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필사본 가사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낡고 바랜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바스라질 것 같던 초서체의 글씨들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흘림체 글씨들이 어찌나 단정한지 풀어져 있던 마음들이 다 숙연해진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떤 열정이 내 피돌기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들어 옴을 느낀다.
돌아보니 투고를 끝내고 소홀했다 싶었던 며칠이 후딱 지나갔다. 왜 그런지 다시금 목이 말라온다. 문 밖을 나서면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을 지나면 동네 어귀에 자그만 예배당이 있다.
꿈결일까, 동짓달 카랑한 하늘을 가르고 내 귓가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소리가 댕댕거린다. 어떤 통보를 내가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감출 수 없는 설렘에 문을 나선다. 우듬지마다 목마른 새를 기다리는 몇 알의 사과에 눈물이 핑 돈다. 내 시가 딱 저랬으면 좋겠다. 잎사귀들이 푸르게 태질 하는 시간을 지나 눈먼 새까지 달게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는 그런 나무였으면 싶다.
늘 변함없는 미소로 잔잔한 격려를 보태주신 영남대 이기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청도까지 오르던 먼 길이 오늘에 이르렀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내 망설임에 참 언어의 결을 환하게 열어 보여주신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끓어오르던 시어들을 담금질하던 교수님의 열정이 미흡한 내 시의 깊은 뿌리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늘 따뜻했던 경주대, 영남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나의 남편과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영광과 두려움을 함께 안겨준 영남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표하며 문 밖에 지천인 저 시의 몸들, 감히 찾아 나서라는 뜻 헤아릴 것을 약속한다.
[심사평]
"사물과 세계 적절히 통제, 시적긴장 부여"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 : 이하석·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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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김지혜 시인(본명 : 김춘순) 1952년 강원도 춘천 출생. 수원여대 졸업. 경기도 성남시 사회복지단체 기아대책 소속 중동제2복지회관 사회복지사
[당선소감]
짐승 배설물이 내뿜던 난로의 온기가 준 선물
당선통보를 받고 예전 벌판의 집에서 느꼈던 온기가 생각났습니다.
딱딱하게 마른 짐승의 배설물이 내 뿜던 난로의 그 온기.
맨 처음 짐승의 뱃속에서 쏟아졌을 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을 그런 배설이라면 지금 나의 이 지난한 배설도 그와 같은 級(급)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늦은 걸음입니다. 뒤처진 걸음입니다. 그래도 간혹, 뒤를 살피는 업이 천직이 될 수도 있다는 용기를 내어 봅니다. 척후병의 막중함으로 詩作(시작)에 임하겠습니다. 안도의 한 숨이 얼마나 방심하는 순간인지를 다시 한 번 되뇌이면서 잠시만 기뻐하겠습니다.
새벽운동시간까지 깨어있는 나를 보며 잠 채근을 해주던 무뚝뚝한 남편과 가족의 둘레에 앉은 승준, 은경, 동현, 수연, 동준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딸만 낳아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던 어머님의 기쁨도 남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시의 언저리부터 살펴주신 박해람 선생님, 목적지를 욕심내지 말고 잠시 쉴 수 있는 쉼을 욕심내라던 그 말씀 내내 새기겠습니다. 또 함께 구름밭을 경작하는 경운서당 문우들, 그대들이 내뿜는 내공 덕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서로를 보듬고 격려해주는 다울동인, 용인문학회 식구들, 첫걸음을 떼게 해 주신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이라는 축제의 자리에 앉혀주신 정희성, 강영환, 허정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시작의 각오를 올립니다. 국제신문의 선택에도 또한 누가 되지 않는 행동을 다짐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심사평]
삶을 응시하는 깊이와 고단한 삶 밝게보는 능력 탁월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의 심사는 예심 없이 271명이 보낸 전체 응모작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 총 27편이었다. 논의에 논의를 거쳐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벗어놓은 외출' '둥근 강' '폐기물집하장 가는 길' '비밀의 화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등 5편이었다. 이 중에서 '비밀의 화원'과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최종논의가 있었다.
'비밀의 화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시로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시였다. 이주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솜씨가 뛰어난 시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삶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화자가 관찰자의 태도로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 김지혜가 고르다는 점을 높이 사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본심 심사 : 정희성 강영환(이상 시인) 허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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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김후인 시인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삼육대학교 졸업. 재림문인협회 회원.
[당선소감]
어머니 밥 짓던 밥 불 생각나
나무의 문이 만들어준 빈 방에 첫 불을 넣으면서 그 옛날 어머니 밥 짓던 밥 불이 생각납니다. 젖은 불 연기에 짓던 눈물. 그 연기는 그리움이겠지요. 제게는 일찍 떠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상실들이 시로 와서, 오래 같이 살다보면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빈자리가 깨워준 서툰 글밭이 자칫 묵정밭이 될 뻔 했지만 이런 지경까지 넓히게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운서당 학우들, 그리고 하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빈방 새로 들이는 각오로 첫 불을 넣고 두려운 불길도 손에 익혀야겠지요. 찬바람이 불지만 제게는 씨앗을 생각하게 하는 봄날입니다.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글 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늘 격려해주신 재림문협 회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등기 심부름을 자주 시켜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방해꾼이면서 따로 글감도 주는 정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시의 씨앗을 틔우고 묻습니다.
[심사평]
치밀한 문맥·팽팽한 거리 믿음직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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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김후인 시인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삼육대학교 졸업. 재림문인협회 회원.
[당선소감]
어머니 밥 짓던 밥 불 생각나
나무의 문이 만들어준 빈 방에 첫 불을 넣으면서 그 옛날 어머니 밥 짓던 밥 불이 생각납니다. 젖은 불 연기에 짓던 눈물. 그 연기는 그리움이겠지요. 제게는 일찍 떠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상실들이 시로 와서, 오래 같이 살다보면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빈자리가 깨워준 서툰 글밭이 자칫 묵정밭이 될 뻔 했지만 이런 지경까지 넓히게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운서당 학우들, 그리고 하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빈방 새로 들이는 각오로 첫 불을 넣고 두려운 불길도 손에 익혀야겠지요. 찬바람이 불지만 제게는 씨앗을 생각하게 하는 봄날입니다.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글 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늘 격려해주신 재림문협 회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등기 심부름을 자주 시켜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방해꾼이면서 따로 글감도 주는 정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시의 씨앗을 틔우고 묻습니다.
[심사평]
치밀한 문맥·팽팽한 거리 믿음직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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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770호 소녀 / 우광훈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우광훈 시인 1969년 대구출생. 대구교대 졸업.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등단. 제2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소설)
[당선소감]
저는 분명히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요. 앨리스는 왜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일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3년 전, 한 무명 소설가는 소설이란 것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쉽게 말해 코커스 경주에서 그 흔한 골무조차 받지 못했던 거죠. 이후, 그는 하루 종일 깜깜한 토끼굴 속을 헤매며 책만 읽었습니다. 재미있고 기이한 이야기만이 시간을 세워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가는 문득 시(詩)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시가 나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오래된 동경과 해묵은 오해 때문이었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오로지 시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조언과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곧장 하트여왕이 있는 성으로 3편의 원고를 보냈습니다. 이후, 그는 우체국에 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이 시의 목을 베어라! 저 시의 목을 베어라!” 3주일 뒤,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물고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울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처구니없음에 한동안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그날 밤, 그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좀처럼 잠들지 못했습니다. 툭 튀어나온 자신의 이가 한없이 부끄러웠으니까요. 존경하는 장토끼 형의 충고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드디어 파멸해버린 것일까요? 그렇게 뒤척이다, 스르르 잠들어버렸습니다. 입가엔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소설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은 온통 지루한 일상과 무관심으로 바뀌어있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험프티 덤프티를 만나려면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하는 거죠? 시냇물인가요? 아니면 양의 가게인가요?
[심사평]
언어의 구체성과 상상력의 탁월함
마지막까지 남은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외 3편,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 외 2편,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 외 2편, 우광훈의 ‘1770호 소녀’ 외 2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이었다. 네 사람 모두 언어의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만만치 않은 수준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은 긴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다양한 감각으로 그려낸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 한 작품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다른 작품이 너무 처져 있었다.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구체성이 시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말티즈가 죽어도 그 딸랑거림을 그리워할 것이다.”라든가, “아내는 土耳犬으로 남고 싶어 하는/저 바다 빛 그늘 진 눈동자를 보았을 것이다.”와 같은 이미지들을 높게 보았다. ‘당선작’으로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역시 ‘외 2편’이 ‘말티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 무리한 설정과 그에 따른 언어의 ‘과부하’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은 재기발랄한 말솜씨와 상상력, 거침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억지가 없는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붕에 걸린 구름의 뼈를 다 발라”내고, “샛강의 입이 건너편 뚝방까지 죽 찢어져”가는 이 작품 또한 충분히 당선의 영예를 안겨줄 만 했으나, 어쩌랴, 이 응모자에게도 작품 간의 심한 편차가 걸림돌이 되었다. 작품 공모에 여러 편을 응모할 경우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하면 뽑는 이에게 불안감을 주게 마련이다.
네 사람의 시 가운데, 우광훈의 ‘1770호 소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함께 보내온 나머지 두 작품도 똑같이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선작에서 보듯이 이 작품은 스케일이 참 크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깊은 사유를 거느린 채, 그것도 아주 느리게, 우주와 역사, 문명세계를 거닐며 현실과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은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닦아 쓰는 말의 절차탁마가 보였고, 행간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신뢰가 가는 시인이다.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걷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 : 도광의(시인)· 문인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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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홍문숙 시인 1958년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성장. 2009년 계간 ‘차령문학’ 등단, 동 문예지 편집위원. ‘석수 서예’, 평택도서관 등에서 한문학 강사로 활동.
[당선소감]
은유의 텃밭에서 세월과 만나다.
아버지는 인문학자시다. 그분이 읽던 흑백의 서책들은 이제 나비 한 마리 꿈꿀 수 없지만 아버님은 가끔씩 내 삶의 철자법이 맞지 않을 때에도 설핏 숨어들기에 좋은 내 인문학의 서책이셨으며 따뜻한 은신처였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내 문학의 시원은 아버지로부터의 어쩔 수 없는 유산일 것이며 유산이란 때로 세월의 미시성을 강의 깊이로 흐르다가 문득 마주치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 그리고 나에겐 내 필생의 힘으로도 낳을 수 없는 어머니라는 의미와 인연의 텃밭, 그 대신 신생의 어머니를 만나는 세월의 대가가 곧 나비였으리라.
권태가 욱신거릴 때마다 텃밭을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한 사나이는 내 권태의 목록과는 관계없는 도시 저쪽의 서류철을 뒤적이거나 어느 소인국의 작은 병정처럼 돌아오곤 했다.
나비가 우화를 꿈꾸는 건 오후의 우울을 낳기 위함이지, 젖은 소낙비가 파줄기의 어느쯤을 똑똑 부러뜨리기도 하는 그 놀랍고 목이 긴 은유 속을 낮은 금속질의 열쇠로 딸깍, 열어주던 한 아이 그 속에서 올겨울엔 아들 정환이와 오월이 되어 은신시킬 새로운 파씨들을 골라보는 일…
내 문학의 항해가 검은 돛배일 때마다 은밀한 등대가 되어주신 박경원 선생님과 ‘차령문학’ 그리고 시내에서 십분 거리의 내 귀가길을 동행해준 몇십년 동안의 평택 방축리행 시내버스에게도 겸손한 감사를 전합니다.
또한 저에게 큰 기회를 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감사드리며 더 깊은 문학의 길로 정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경직돼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 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 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현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심사 : 신경림(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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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 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강은진 시인 1973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수료.
[당선소감]
포장하지 않고 사람 마음 움직이는 詩 쓰고싶어 잠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연명치료를 받던 생면부지의 노파가 갑자기 사력을 다해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백년의 말들이 출렁였고 미인(美人)의 청춘이 푸르스름한 눈썹에 가지런히 염되어 있었습니다. 편한 호흡으로 써내려갔던 시인데 뜻밖에 당선의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분이 어디선가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다 내려 놓으려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깊은 고통의 밤 가운데 짧은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늘 네 작품이 최고라고 격려해 주셨고, 환한 웃음으로 수상 소식을 알려주시곤 했던 첫 국어선생님. 그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다시 시를 붙잡도록 만들었습니다. 고(故) 최학규 선생님께 너무 늦은 감사를 바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멋진 시가 탐나서 화려한 수사로 공허함을 포장하고 라캉이나 로트만 같은 이름을 기웃거리기도 했었지만, 결국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시의 진심임을 깨달아 가는 중입니다. 부족함 속 진심의 힘을 믿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증명되지 않은 저에게 시의 길을 열어주신 최동호 선생님. 빚진 마음, 배신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으로 조금씩 갚아가겠습니다. 따뜻했거나 혹은 혹독했던 학형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에게는 영원히 시인이신 아버지, 우리 엄마, 사랑합니다. 호연·대연, 긍정의 힘을 믿길. 나의 모든 것인 채원에게 남길 것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호일, 최후의 독자일 당신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사평]
삶의 건강한 구체 다뤄… 한국 시단 큰 재목되길
예년에 비해 투고된 작품량은 늘었으나 수준은 비슷했다. 윤지문의 '새와 흙', 강은진의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석상준의 '뚜껑', 김후인의 '결치(缺齒)' 등 네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뚜껑'은 '그냥 썩게 놔두는 것보단 나중에 상하더라도 누군가 퍼먹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에'에서 알 수 있듯이 산문성이 지나치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 '결치(缺齒)' 또한 빈 집이 늘어나는 시골 풍경을 결치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조금 낡은 감이 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남은 두 편 중에서 '새와 흙'은 기성시인의 시를 인용한 점이(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인으로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또 다른 투고작 '새와 구름'에서 구체성이 부족하고 한껏 멋을 부린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재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심사 : 황동규(시인)·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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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 조세희 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정창준 시인 36세.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
[당선 소감]
“철거민 들여다보면서 詩 표현 떠올려”
“시를 다시 쓰면서 딱 3년만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가 바로 3년째가 되는 해네요.” 시 부문 당선자 정창준씨(36·사진)는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시를 썼지만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취직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와 멀어졌다. 내년이면 교사 경력 10년째인 정씨가 그 꿈을 다시 꺼내들게 된 것은 3년 전 “대학시절 썼던 시들이 좋던데”라는 말을 대학원 교수로부터 전해들으면서다. 대학시절 썼던 시들은 컴퓨터 메모리가 삭제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우연치 않게 남아있던 유일한 프린트본을 후배로부터 돌려받으면서 정씨는 다시 시를 쓰게 됐다. 그리고 3년째, 마침내 ‘오래된 꿈’이 이뤄졌다.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정씨는 <난쏘공>의 화법을 인용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혔다.
“용산참사는 결코 있어선 안 되는 너무 끔찍한 일인데도, 사람들에게 쉽게 회자되기만 할 뿐, 절실한 이야기들은 외려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난쏘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고 학생들에게도 꼭 가르치는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1970년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음아파서 그것을 모티프로 시를 쓰게 됐습니다.” 정씨는 자칫 상투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체화된 언어로 피부에 와닿게 표현했다는 호평을 심사위원들에게 받았다. 정씨는 “울산은 급격한 팽창 과정을 거치면서 용산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가진도시”라며 “재개발이 예정된 학교 옆 철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표현들이 나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선작 이외의 다른 시에서도 사회문제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정씨의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정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대형마트, 베스트셀러나 실용서로 채워지는 서점의 풍경을 시로 써내려갔다. 그는 “사람에서 비롯되고 사람다움을 지키는 게 문학의 가장 큰 소임인 것 같다”며 “사회적 약자들이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신춘문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며 “아직 시 세계나 세계관이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싶다”고 새내기 시인의 포부를 밝혔다.
[심사평]
“실종된 현실인식의 발견… 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 외 4편),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 외 4편), 김영진(‘도끼발’ 외 4편), 류성훈(‘밤의 도플러’ 외 4편),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 외 4편)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심사 : 이시영(시인), 황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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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박송이 시인 30세. 전북 순창군 동계면. 한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과정 수료.
[당선소감]
나는 작년 이맘 때 대학 노트에 이렇게 쓴 적 있다. '숲은 만져 본 적 없는 울음의 낯선 천국이다. 숲은 헐벗은 동공이다.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지나치는 언젠가 살아본 그만그만한 표정이다.' 나는 자주 숲길에 들어섰고 숲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곤 했다. 숲은 늘 낯설고 평온했다.
종종 숲에서 길을 잃었고 숲길을 한참 걷다보면 어느새 어둠이었다. 숲 어딘가에 퍼질러 한나절 먹먹하게 울고 싶다가도 간혹 숨이 턱턱 막혀왔기에 느리고 길게 호흡해야만 했다. 내가 한 때 메마른 심장으로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노트에 나를 적는 밤이 짧아지기를 바란다. 나 아닌 다른 여행자의 숲길에서 나 아닌 무수한 여행자들에게 말 걸 수 있는 밤이 오래 찾아 들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여태 사랑해 왔던 모든 사랑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사랑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서로의 여행과 마주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숲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내가 무심결에 지나쳤을 숲길 사이로 한 무더기의 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내 사랑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싶다. 나는 빛의 표정으로 또 다시 살고 싶어진다.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신익호 지도교수님과 여러 교수님들께, 문예창작학과 김완하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멀찌감치 어떤 절실한 힘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애인에게 감사드린다.
[심사평]
새의 존재에 대한 통찰 돋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에 낙점
예심 없이 모든 투고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숙독과 합평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시국 탓인지 꽤 많은 작품에서 유행처럼 죽음을 서슴없이 다루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또한 빈번한 외래어의 사용과 심지어 영어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는 것은 21세기 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가진 작품에 기대를 걸며 '가족의 탄생'(팽샛별), '감독의자'(지석현), '새는 없다'(박송이)를 최종심에 올렸다. '가족의 탄생'은 영화를 보듯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 시를 들어오게 하는 힘이 좋았다. 하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산문성이 문제였다. 그런 산문성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맛을 잃게 해 아쉬웠다. 앞으로 가벼워지는 것에 대해 노력해주길 부탁한다.
'감독의자'는 신선한 소재의 참신한 작품이었다. 산문시였으나 시의 흐름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투고한 다른 작품이 그와 같은 무게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국어로 쓰는 시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새는 없다'는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긴 길이의 시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감에 좋은 점수를 얻었다. 투고자들이 흔히 가진 애매모호함을 극복하는 선명성도 좋았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기에는 힘의 결락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새는 없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 대성을 바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들에게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 : 신경림(시인) 정호승(시인) 정일근(시인ㆍ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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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권민경 시인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네 사람의 것이었다. 임춘자 씨의 ‘주유소의 형식’ 등 6편은 안정된 표현력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연우 씨의 ‘그늘의 위대한 고집’ 등 6편은 언어에 대한 수사적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주었다. 류성훈 씨의 ‘저녁의 진화’ 등 5편은 어법의 상대적인 참신함이 인정되었다. 권민경 씨의 ‘대출된 책들의 세계’ 등 5편은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적었던 임춘자 씨와 권민경 씨의 시들이었다. 임춘자 씨의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심사 : 이시영(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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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유빙(流氷) /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당선 소감]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저를 독려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지 않을 때,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을 때, ‘소통’은 거짓과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조금씩 버리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만큼 타인의 구원도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대한 거절’을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이에서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더디게 쓰더라도 그만두지는 않겠다. 시 한 편과 한 편 사이에 열 길 낭떠러지가 있음을 잊지 않겠다.
한 줌의 시를 건져 올려 주신 문정희,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저를 독려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선후배님, 동학들께 감사드립니다. 화요팀 선생님과 문우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계신 스승들과 가까이 있는 지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시의 시작이자 끝인 할머니, 오래 사세요. 은영아, 사랑해.
[심사평]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눈 돋보여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을 찾긴 힘들었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임여기의 ‘면접관’, 정승기의 ‘실종’, 이재흔의 ‘스파이더맨의 후예’, 이도은의 ‘아주 식물적인 꿈’, 신철규의 ‘유빙’ 등 5편이었다. ‘면접관’은 면접관과 면접인 간의 관계 대립을 긴장되고 설득력 있게 고조시켜나갔으나 결구 부분이 너무 안이했다. ‘스파이더맨의 후예’는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나타냈으나 ‘제각기 다른 일상의 벼랑 끝에서 한 번씩은 실족했던 사연들이’ 같은 표현이 산문적이고 진부했다. ‘실종’ 또한 현대인의 실종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산문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아주 식물적인 꿈’은 식물적인 꿈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체적 양상이 불명확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 결국 당선작은 ‘유빙’으로 결정되었다. ‘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한국시단의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
심사 : 문정희·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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