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11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지방신문포함)

문근영 2015. 4. 25. 03:13

201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팔거천 연가 / 윤순희
 
 

  여름밤 내내 *팔거천변 돌고 또 돌았습니다 아직 물고기 펄떡이는 물 속 물새알 낳기도 하는 풀숲 달맞이꽃 지천으로 피어 십 수년째 오르지 않는 집값 펴지기를 깨금발로 기다리지만 대학병원 들어서면 3호선 개통되면 국우터널 무료화 되면 하는 황소개구리 울음 텅텅 울리는 탁상행정 뿐입니다
 

  풀숲에서 주운 새들의 알 희고 딱딱한 것들 날마다 수성구를 향하여 샷을 날려 보내지만 죽은 알들은 금호강을 건너지 못하고 팔달교 교각 맞고 튕겨져 나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저 물새들 살얼음 낀 물속에서 언 발 교대로 들어 올렸다 내릴 텐데
 

  환하게 타오르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의 불빛 온기는 어디까지 번져 갈 것인지요
  물새들의 울음소리 팔거천 가득 울려 퍼지는 날 낮달 같은 새댁들 강변 가득 붉은  나팔 불며 여덟 갈래 꿈꾸며 비상 하겠지요.


(*팔거천 : 팔공산 자락에서 흘러든 여덟 갈래 물줄기가 합쳐져 대구의 강북인 칠곡 신도시를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달집태우기 행사를 한다.)

 

 

윤순희 시인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석사과정. 서지 동인, 산내들 동인, 21세기 생활문인협회 동인, 시 가마 동인.

 

 

[당선소감]


나의 바다를 지켜 온 시(詩) 


  마흔 넘어 시작한 늦깎이 대학생이었습니다. 달빛아래 환한 목련꽃 교정의 야간대학. 대구에서 서울까지, 대구에서 조치원까지 KTX 보다 빠르게 달렸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 늘 짧고 무심하기만 하였습니다.


  일출보다 뜨거운 시를 향한 열정이, 문무왕릉처럼 나의 바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물결 철썩일 때마다, 빈 모래사장에 갈매기 발자국 콕콕 찍히듯 시는 내 속에 새겨졌습니다. 황룡사지 빈 터 오층 석탑 속에 차곡차곡 쟁여 두었습니다. 풍경소리 홀로 해풍에 울렸습니다. 해송의 큰 그늘 아래 살포시 내려앉은 해국처럼, 때로는 해송의 따끔함에 찔리기도 하면서, 바다의 빛깔 시의 빛깔만 그려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난 일곱 해의 시간들이 마침내 신춘이라는 꽃을 피워냈습니다. 그 꽃 아직은 작고 여린 땡땡 몽우리에 불과합니다. 칼바람 살얼음 속에서 살며시 꽃 피우는 홍매화의 마음으로 첫 봄을 시작하겠습니다.


  묵묵히 뒷바라지 해 준 나의 얼룩남자와 세 아이들, 사랑하는 친구(해정, 우정, 윤이)들이 있어 더욱 힘이 났습니다. 20년 나의 직장, 나의 고객, 신창재 회장님 사랑합니다.


  5년째 지도해 주신 조정권 선생님, 대학원의 거목이신 김명인 선생님, 경희사이버대학의 이문재 선생님, 대구 이기철 손진은 선생님, 별빛처럼 선명한 가르침 깊이 새기겠습니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삶의 연륜 묻어나는 감수성에 호감

 

  이름이 가려진 채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30명의 작품 126편을 읽고 나서 ‘치즈의 눈물’ ‘벌침’ ‘거울 속의 나’ ‘팔거천 연가’ 네 작품을 가려내었다. ‘치즈의 눈물’은 말을 다루는 솜씨가 있고 잘 읽히나, 툭 차고 일어나 비상할 시점을 놓치고 시가 제자리에 맴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벌침’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톡 쏘는 시’ 한 편이 마치 죽음을 무릅쓰고 쏜 ‘벌침’과 같다는 생각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치열한 시정신을 읽을 수 있으나 함께 제출된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걸 받쳐줄만한 뒷심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


  ‘거울 속의 나’는 시상이 명징하고 통일성이 있어 깔끔하게 읽힌다. 그러나 ‘거울’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너무도 흔한 주제라서 신인다운 신선함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팔거천 연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 비해 삶의 무게나 연륜이 느껴지는 구체적인 표현들이 안정감이 있고 감수성도 예민하여 호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제출된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이웃에 대한 따듯한 마음의 질량도 듬직했다. 숙고 끝에 <팔거천 연가>를 당선작으로 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 드린다. 정진이 있기 바란다.

 

심사 :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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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손톱 안 남자 /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송해영 시인
1985년 장흥 출생. 2004년 광주대 문예창작과 입학. 2008년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입학.

 

 

[당선소감]

 

"온몸으로 '시' 꽃 피울 것"

 
  어렸을 적 잘하는 것이라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전부였다.

 
  세월이 지나면 잘하는 것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복잡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워야했다.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쓴 시로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를 쓰는 것은 이미 운명이 되어있었다.

 
  시는 내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실수를 했더라도 나무라지도 않았고 조금 늦게 오면 기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시는 멀리 달아나 버리기도 해서 애를 먹은 적이 많았다.

 
  낙선의 고배를 마실 때마다 내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에겐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시인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됐다. 성실하게 시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져주면 시는 내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를 기특하게 생각하던 때에 당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신 스승 이은봉 교수님께 큰 절을 올립니다. 문학이라는 고행을 함께 하는 광주대 문창과 교수님들, 선후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미소로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J, 언제나 내편 난희, '행'이라고 불러주는 모든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미흡한 저에게 큰 문을 열어주신 고재종 심사위원님과 전남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당선 소식에 눈물로 축하해주신 우리 김복순 여사님과 딸이 어려운 길을 가려할 때마다 아낌없이 돌다리를 놓아주신 아버지 송승종 씨, 언제나 누나를 지지해주는 대웅이, 대우. 가족 모두 사랑합니다.

 
  더욱 뜨겁게, 온 몸으로 시라는 꽃을 피워 보이겠습니다.

 

 

 

[심사평]

 
"마음 속 갈등 절묘한 표현 돋보여"

 
  이번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시들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퇴조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치부하기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이를 대체한 얄팍한 생태주의, 깊은 사유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감상주의에 머무른 많은 내면의 시, 그리고 판타지들을 보면서 괴로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다행히 주명숙의 '즐거운 제국', 강혜원의 '카나리아',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 라는 시편들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주명숙의 시에서는 주방을 '즐거운 제국'으로 보고 거기서 '장기집권'을 누리는 주부 입장에서 "잘 버무려진 식단은 제국을 견인해 나갈 크레인이니까요"라고 말하는 그 발성법이 발랄하여 오래 눈길이 갔다. 강혜원의 시는 새장에 갇힌 아이새와 엄마새의 논전을 통해 아이새의 위험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이에 대응하는 엄마새의 안일한 통찰을 대조적으로 드러내 세대간의 갈등과 소통을 말하고자 한 상상력이 빛나는 시였다.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엔 반전이 있다. 일찍이 서정주의 시 이래 여자의 '손톱'은 성적코드였다. 이 손톱에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하는 남자의 요구에 부응한 메니큐어칠 행위는 남자의 변덕스런 욕망에 노예가 되어가는 여자의 안쓰러운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반전은 남자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진술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갈등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마음은 남자의 '조종'을 거부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은 어느새 나도 그를 조종하고 싶은 성적욕망 말이다.

 
  위 시들 중에 한 편을 골라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예심자를 불러 상의했으나 결국 나의 결정은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둔 송해영이었다. 송해영은 다른 시편들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서 믿음이 갔지만 표현의 평이함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를 보완하면 좋은 시인이 될 걸로 믿어 당선으로 민다.


심사 : 고재종 시인<광주ㆍ전남작가회의 회장>

 

201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마드리드 호텔 602호 / 이재성

 


독한 럼주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급선원들이 돌아온 바다와
떠나갈 바다를 위해서 건배를 하는 사이
호텔 602호는 마스트를 세우고 바다 위에 떠있다.
아니 이미 항진 중인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허무, 낡은 시집의 행간, 해무는 같은 색이다.
점점 깊어지는 밤의 해무
수시로 무적이 길게 혹은 짧게 울리고
J는 아직 조타륜을 잡고 자신의 바다를 항해 중일 것이다. 조타실의 문을 열자
바다 속에서는 해독할 수 없는 안개가 타전되고
나는 이미 길을 잃은 한 척의 운명
해도를 펼쳐 북극성의 좌표를 찾는다.
J도 이 바다를 떠나 희망봉을 찾아 갔을 것이다.
스무 살, 바다를 잡을 때마다
늘 빈 손바닥이었다.
지금도 바다는 나에게 오리무중이다.
늙은 고양이가 친숙한 비린내를 풍기며
안개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안녕, 이 하룻밤도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안녕, 나도 사라질 것이다.
J가 누워 있던 침대엔
낡은 바다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이번 항해가 길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무사히 귀항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드리드 항에서 이 호텔은
항해사들로 이미 만원이다.
하지만 이 호텔에는 602호는 없다.

 

 

이재성 시인
1987년 울산 출생, 창원에서 성장. 2009년 경남대학보사 ‘10·18문학상’ 시 당선.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년 재학 중
 

 

[수상소감]

 
소중한 한마디 ‘초심’


  파도 위를 방랑하는 선원들은 마음의 등대를 찾고 있다. 외눈박이 희망의 불빛을 따라 외딴섬처럼 떠다닌다. 하늘길이 열리는 시간, 마지막 별빛마저 낮별로 사라지는 순간, 등대의 편지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순항을 염원하는 불빛이 선원들의 코끝을 적시면 뱃머리는 가볍게 당신 곁으로 향하고 남은 자들의 바다는 밤이 오길 기다린다. 파도는 잔잔하게 등대를 바라본다. 또다시 떠오르는 태양 앞에선 언제나 등대는 바다를 끌어안는다.

  꿈속 일렁이던 하늘을 바라보면, 통통 튕기던 기타소리 아스라이 울리던 바다, 톡톡 노크를 하면 희망의 불빛을 볼 수 있을까, 하늘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기다리던 등대의 편지. 펼쳐보면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한마디가 있었다. ‘초심(初心)’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항상 든든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 꿈의 시창작교실을 열어 주신 경남대학교 조기조 처장님, 김정대 원장님, 함께 공부하는 ‘자카’의 친구들, 국어국문학과 교수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믿음직한 일명 ‘9명의 꿈에 배고픈 아이들’과 저의 소중한 인연들이 있어 제가 이 자리에 선 것 같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희망의 불빛을 가지고 초심 잃지 않겠습니다.


  


[심사평]
  

몰입·반전의 시적 매력 뛰어나

 
  신춘문예 시 부문 투고자가 지난해에 비해 많았다. 전국에서 많은 작품이 투고됐다. 엄격한 예심을 통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도 14편이나 되었다. 소재도 다양하고 시의 맛들도 독특했지만 최종심에 4편 ‘어떤 습격’, ‘장미와 칸나 사이’, ‘록클라이밍’, ‘마드리드호텔 602호’가 남았다.

  ‘어떤 습격’은 노모와 아들이 은행나무를 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은행나무에서 새를 발견하고 ‘내가 해마다 가을이면 털어낸 것들 모두가/새들의 노란 울음이었나’까지 이끌어 내는 힘이 돋보였다. 하지만 그 힘을 만들기 위해 시가 가진 산문성이 강한 것이 흠이었다.

  ‘장미와 칸나 사이’는 잘 쓰인 시다. 시를 만들어 내는 기술도 남달랐다. 같이 응모한 시들도 잘 다듬어진 시였다. 단지 기존의 문예지에서 읽을 수 있는 익숙함에 심사위원들의 우려가 있었다. 신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패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록클라이밍’과 ‘마드리드호텔 602호’는 같은 수준의 시였다. 어느 것을 당선작을 뽑아도 좋았다. 당선작을 뽑는 것이 ‘진검승부’였다.

  ‘록클라이밍’은 힘과 절제가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읽히는 속도가 있었다. 암벽타기를 인생에 비유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날카로웠다. ‘추락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벽을 오른다’는 명제는 누구에게나 쉽게 감동으로 이어지는 시였다.

  ‘마드리드호텔 602호’는 오랜만에 만나는 신춘문예 풍의 시다. 28행의 비교적 긴 시인 데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만만찮았다. 한 번 읽으면 끝까지 읽게 하는 환상적인 시적 매력에, 바다에 대한 이해력도 뛰어났다. 마드리드호텔 602호에서 시작되는 바다 이야기가 마지막에 가서 ‘하지만 이 호텔에는 602호가 없다’는 반전이 시의 맛을 진하게 느끼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숙독과 합평을 통해 ‘마드리드호텔 602호’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진검승부를 겨룬 ‘록클라이밍’의 투고자에게는 내년에도 좋은 시로 만날 수 있길 바란다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광석·정일근>


 심사 : 이광석,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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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새장 /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강정애 시인
1959년 전북 장수 출생. 부산여자대학 수료.

 

 

[당선소감]


생일날 찾아온 가슴뛰는 당선


  먼 곳의 숲을 쓸고 온 바람이 나무의 귓전에서 쉬고 있습니다. 식물들의 언어란 저렇듯 손가락을 귀에 후비듯 만들어지는지 나무줄기 끝 빈 고막이 키득거림으로 가득 차는 것을 봅니다.

 
  물고기의 씨앗을 품은 구름이었을까요?
 

  낮달을 돌아 우회하는 구름이었을까요?

 
  언덕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몸을 접는 호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 군요.

 
  시는 왜 굳이 나에게 찾아와 단추가 되려 했는지 의문이 드는 날들이었습니다. 불안한 꿈은 늘 잠을 앞질러 가곤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가끔 옥타비오 파스의 단추를 읽었습니다. 그때 시는 제 옆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뒤집힌 풍뎅이를 집어 바로 놓듯, 그동안 알고 지내던 시를 뒤집어 놓고 싶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웬 공부가 그리 바쁘냐는 핀잔도 간혹 있었습니다. 등으로 날아다니는 것들, 그러나 그 등 때문에 버둥거리고 있다는 것을 보는 마음을 간신히 찾았습니다. 참 고맙고 고마운 늦은 발견입니다.

“생일 축하해.”
생일 날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심사를 보신 백무산 선생님과 안도현 선생님의 축하 전화를 받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눈물과 함께 쓴 알약 같은 긴 시간들이 흰 눈발로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듯 당분간은 아프지 않은 시를 만날 것 같았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선생님들 앞에 큰절 올립니다. 그리고 내 심장과 같은 남편과 두 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을 다 말할 수 없지만 시의 첫 걸음마를 가르쳐주신 박제천 선생님. 우문(愚問)을 들고 가면 늘 현답(賢答)으로 지도해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경운서당 학우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살아있는 생각과 언어의 결


   응모작들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이 너무 커서 완전한 독해가 어려운 시들이 적지 않았고, 유행하는 소재를 검증 없이 끌어다 쓰는 안이한 시도 여럿 있었다. 감동을 생산하려는 의지보다 시를 잘 만들려는 욕망이 비대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시의 리얼리티에 대한 배려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신성희씨의 ‘신발들이 날아간다’는 가장 읽을 만한 시였다. ‘벌판에 버려진 신발이 하나 있다/그 외발을 벌판의 창문이라고 혼자서 불러보았다’는 첫머리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들이 시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다만 지나치게 궤도를 이탈한 몇몇 불안한 표현에 꼬투리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아깝다. 머지않아 좋은 시인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강정애씨는 시적 대상을 객관화하면서도 충분히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당선작 ‘새장’은 생각과 언어의 결이 살아 있는 시다. 자칫하면 상투성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 나무나 새와 같은 소재를 붙잡고 묘한 긴장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자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대상을 자기 안으로 바짝 잡아당겨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방증이다. 앞으로 서정의 지평을 크게 넓히는 시인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심사 (본심) : 백무산·안도현, (예심) : 유성호·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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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래내시장 / 하미경

 


야채 썩는 냄새가 고소해지면
장터는 복숭아처럼 익는다
중고 가게 앞 내장을 비운 냉장고가
과일의 단내며 생선냄새며 땀내들을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일 무렵
은혜수선집은 벌써 불을 켜고 저녁의 한 모퉁이를 깁는다
박미자머리사랑을 지나면 몽땅 떨이라느니
거저 가져가라느니 농약을 치지 않은 다급한 말들이
등을 타고 내려 고무줄 늘어난 추리닝처럼
낭창낭창 소쿠리 속으로 들어간다
남들 보기 거시기 하다고 자식들이 말려도
팔 것들을 꾸역꾸역 보자기에 챙겨 나온 할머니는
돌아갈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빠진 이 사이로 질질질 과즙을 흘리며
복숭아 짓무른 데를 떼어 물고 오물거린다
문 닫는 속옷 가게에는 땡땡이무늬 잠옷이
잠들지 않고 하늘거린다 잠옷을 입고
늘어지게 자고 싶은 허리 대신
빈 바구니마다 어느새 어둠이 드러누웠다

 

 


[심사평] ­ 
  
  올해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는 오백 십여 편의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었다. 응모하신 분들의 주소가 일부러 안배라도 한 것처럼 전북뿐만 아니라 서울을 비롯해서 8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예년에 비하여 많은 편인지 적은 편인지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 심사를 올해 처음 맡게 된 선자로서는 잘 모를 일이지만 510 : 1이라는 그 경쟁률이 참으로 아찔했다. 대개는 한 분이 3 편 내지 10 편씩 보내셨다는데 어떤 분은 48편이나 되는 시를 한꺼번에 응모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48 편은 너무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달랑 3 편만 보내신 경우는 그걸로 그 문학적 역량을 가늠하기에는 너무 섭섭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런데도 3 편씩 응모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는데. 그건 아마도 여기저기 중복투고를 피하려고 작품들을 분산시킨 결과일 것이다. 예심을 거쳐 결선에 오른 작품은 여섯 분이 응모하신 23 편이었다. 결선에 오른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런 걸 행복한 고민이라고들 한다는데, 막상 닥치고 보면 그건 결코 행복한 일이 못 된다. 행복하기는커녕 작품을 하나씩 제외시킬 때마다 여러 차례나 망설여야 하는 게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 한 편만 가려 뽑을 게 아니라 한 사람당 한 편씩 여섯 편만 당선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렇게 뽑아 본 여섯 편은 다음과 같다. 성함을 밝히는 일이 낙선된 분들께는 결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품명만 밝힌다.


  「분천동 본가입납」 , 「인절미」, 「개성삼계탕」, 「엄마의 인주」, 「장항선」,「모래내시장」. 「인절미」,「개성삼계탕」,「장항선」,「모래내시장」은 공교롭게도 응모작 묶음의 두 번째에 있는 작품들이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보면 번번이 맨 앞에 내세운 작품보다 그 다음 작품이 선자의 맘에 드는 일이 많은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맨 앞에 내세운 작품들은 흔히 말하는 ‘신춘문예적 경향’을 의식하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간 것 같고 , 그런 경향으로부터 조금 비껴 선 두 번째 작품들이 비교적 안정감을 유지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분천동 본가입납」과「모래내시장」두 작품을 마지막까지 저울질하다가 작품의 안정감과 말맛과 그 정감들이 다소 돋보이는 하미경의「모래내시장」을 당선작으로 뽑으면서 동짓달 긴긴 밤, 뽑지 못한 작품들 때문에 못내 마음이 무겁다.


심시 : 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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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덩굴장미 / 김영삼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심사평]


참신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아 
   
  금년도 응모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작품 수는 많았으나 특출한 작품이 없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과 신춘문예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


  이번 심사에서는 오늘 이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시,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 그리고 신인다운 특성과 참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작품 중 오영애씨의 `흰 꽃이 지다'는 언어감각은 뛰어났지만 주제의식의 깊이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정솔씨의 `공룡능선'은 비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당선작인 김영삼씨의 `덩굴장미' 외 `初冬'은 뛰어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았다.


  예를 들면 `덩굴장미'를 `차가운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또한 “자신이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라는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이었다. 주제의식 역시 보편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특히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상징성을 아이러니한 표현 기법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 : 이승훈·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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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등대 / 정금희 (일반부 당선자)

 

 

그것은 선명한 결을 잘 익힌 맛이다
나의 하얀 말도 새벽 바다 동쪽 하늘을 잡아당긴다
잡아당겨도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
어린 바다 뿌리를 이리저리 파 본다
바위 속에서 물의 보푸라기를 잡는다
그 보푸라기를 비벼 차를 끓이면
주전자 속에 끓어오르는 물의 시간
폭포소리가 보인다
소나무 송진향이 보인다
잠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온다
고향의 뿌리를 천천히 잡아당긴다
새벽 닭 울음
먼 빛의 진동소리가 보인다
그 맛이 뾰족뾰족하다

 

 

 

D-day / 송혜경 (학생부 당선자)

 

 

열 뚜우ㅡ시!
요 귀여운 꼬마아가씨가
여태 잠을 안자고 내게 시간을 알린다.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화면구석에 메모 하나가
얄밉게도 내게 오늘의 일정을 알린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 아래 검은 그림자가 내 얼굴을 집어 삼킨다.
잔잔한 여드름이 뚫고 올라와 자리한다.


책상을 살펴본다.
구김 없이 빳빳한 문제집이 나를 얄밉게 쏘아본다.
다 듣지 못한 동영상 강의가 자장가를 불러준다.


내일을 위해, 아니 오늘을 위해
이제 그만 따뜻하게 데워진 전기장판으로 달려가
그간 매고 다니던 피곤을 내려놓고 싶다.


한ㅡ시!
잠 좀 자라, 꼬마아가씨야!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구석에 메모 하나가
얄밉게도 내게 오늘의 일정을 알린다.


오늘의 일정 : 중간고사 D-day.

 

 

 

[심사평 -  일반부]
 

삶의 이력, 우리 생의 아름다운 집 한 채


  2011년 뉴스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는 전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작품을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267편에 이르는 응모작을 윤독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우리의 민족문학인 시조에 대한 열정이, 바다 건너 탐라까지 불꽃처럼 타올랐기 때문이다.
 

  제주지역 신춘문예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응모하신 많은 분들이 제주의 정서를 작품에 펼쳐 보였다. ‘해녀, 용두암, 오름, 서귀포, 우도’ 등이다. 작품을 무리하게 이끌고 가느라 그러한 시적 주제들이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발견한 소재들을 긴강감 있게 끌고 가는 응모작들이 눈에 띄었다. 감상을 진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치밀한 묘사와 관찰로 새로운 감흥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최종심에 오른 임태진의 「제비집」, 이창선의 「섶섬」,오창래의 「우도 생각」, 문제완의 「石衣, 바위가 옷을 입다」, 백점례의 「물의 길은 희다」가 올라왔다.
 

  「우도 생각」은 우도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절규로 중첩시키면서 시적 발상을 전환하였으나, 언어를 함축시키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石衣, 바위가 옷을 입다」는 4수로 이끌면서 시적 전개는 무리가 없었으나 부분 부분을 설명으로 처리해 전달의 힘이 약했다.「물의 길은 희다」는 시조를 다루는 부드러움의 힘은 앞섰으나 주제를 살리지 못해 난해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태진의 「제비집」과 이창선의 「섶섬」으로 압축되었다. 이창선의「섶섬」은 나뭇잎 섬으로 귀결하면서 그 풍경을 서귀포와 연결, 전개한 사유의 힘이 있었다. 예컨대 임태진이 다른 작품 「화재주의보」연작에서 보여준 삶의 비명과 탄식처럼. 그러나 「제비집」에서 사글세의 남루한 살림과 삶의 여정을 이입해 특히 “해마다 삶의 이력에 둥지를 틀고 산다”에서 볼 수 있듯이 춥고 가난한 우리 생의 아름다운 풍경과 서정의 밀도를 더 높이 평가했다.

 
  심사 결과, 당선작으로 임태진의 「제비집」을 뽑았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서정을 펼쳐 시조문학의 재목이 되기를 바란다. 끝까지 남으신 분들의 작품에도 깊은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이번 계기로 도약의 시간을 갖도록 부탁드린다.


심사 : 이승은 · 박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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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사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심사평]


선명한 묘사, 참신한 비유 돋보여

 
  13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한 편의 뛰어난 시를 고르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다. 오랜 수련과 고뇌를 거쳐 생산되었을 다기한 사연의 시들은 그 부피와 다양성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의 눈을 확 트이게 하는 작품은 쉬 찾아지질 않았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수준급의 기량과 언어의 진정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다른 응모작들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시편들로 우종태씨의 '대패질'외 2편,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외 2편, 고경숙씨의 '고사목'외 3편을 최종적으로 선별해놓고 고심을 했다.


  우종태씨의 경우 오랜 습작을 거친 분답게 시를 끌어가는 저력과 안정된 짜임이 돋보였지만 뒷심이 조금 딸리는 듯했다.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는 묘사와 진술능력이 뛰어나고 이야기의 전달도 뚜렷했지만, 다른 작품들이 그에 상응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고경숙씨는 언어를 다루는 재치가 상당해보였다. 묘사의 선명성이나 비유의 참신함에 위트까지 두루 갖췄고 리듬에 대한 고려도 엿보인다. 그러나 재치가 승해서일까, 가끔씩 어휘가 시적 맥락 안에서의 조화를 잃고 튀는 흠결이 있었다. 나름대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근본 명제를 들어 우리는 최종적으로 고경숙씨의 '고사목'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외에도 한교만, 안은주, 백명희, 이경옥 제씨의 작품들도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음을 밝혀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와 함께 지속적인 정진을 부탁드린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 있으라!    <김승립·시인>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 이 명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불교신문 2685호/ 1월1일자]
  
     

[당선소감] 

 
천의무봉을 꿈꾸며
 

  뜨거웠던 지난 여름 어느 날, 매미가 밤을 새워 방충망에 매달려 울었다. 매미의 눈에는 밤새 흘린 눈물의 흔적이 하얗게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매미가 몸을 흔들고 날개를 퍼덕였다. 춤을 추는 듯했다.

 
  사르나트에서 사정없이 내리치던 죽비를 얻어맞은 교진여의 영혼처럼 울음 울던 참매미의 갑작스런 춤사위에서 매미의 깨달음이 보였다. 그렇구나, 그 동안 나는 나를 들여다 본 세월이 없었구나. 그리고 어디에서라도 진실로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었구나. 나는 비로소 정면으로 내 앞에 서 보았다. 시를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나는 ‘내 껍데기’와 싸웠을 뿐이었다. 서서히 나를 알아가는 순간,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시에 눈 뜸이 내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어 주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윤회와 밝음과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눈에 보이지 않던 미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는 내게 그렇게 한 세상을 열어 주었다. 2년여의 짧은 시 공부에서 나는 순수의 하늘과 바다와 들녘을 누비며 자연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습작에만 열중했다. 그것은 내 삶에 주어진 최초의 자유였다.

 
  지금 이 순간, 시를 지도해 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님이지만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상을 어머님의 영전에 바친다.
  
    
 
[심사평]

 
잘 익은 말의 빛깔
 

  아침의 언어는 언제나 눈부시다. 신춘문예의 벽을 넘기 위해 오래고 먼 모국어의 장강을 거슬러 올라온 신인조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소리와 뜻을 절정으로 뽑아낸 시, 시조는 더욱 그렇다. 시조가 우리의 전통시인 터에 굳이 자유시와 나뉘일 까닭이 있을까마는 지금까지의 현상은 분리해서 공모를 했었는데 불교신문의 경우는 시라는 큰 틀 속에 묶은 것이다.
 

  총 310인의 응모자에 편수로 10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대체로 시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가고 있으며 시 경작을 하는 후보층이 두텁다는 것이었다. 다만 시행지가 주는 종교적 선입견 때문인지 불교적 소재나 주제의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많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감점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식적인 필요는 없어야 할 일이다.

 
  어렵게 가려낸 결과 ‘분천동본가입납’ ‘순천만의 저녁’ ‘소금꽃’ ‘돌탑을 쌓으며’ ‘대숲이 있는 항아리’를 최종심에 올려놓고 저울의 눈금재기를 해서 ‘분천동본가입납’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도 예술의 한 양식인 이상 시대적 패러다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해 특히 신인들이 좇아가는 시의 흐름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선작 ‘분천동본가입납’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어메의 젖”과 만나는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을 살고 잇는” 정경들이 크게 꾸미지도 않으면서 깊고 은은한 가락으로 펼쳐진다. 다시 아기가 되는 화자와 어메와의 해후가 “…니더”의 화법으로 전해주는 잘 익은 말의 빛깔이 오래 묵은 향기로 피어난다. 함께 보내온 ‘추사가 보내온 저녁’이 작품을 끌어올리는 밑밭침이 되었음을 덧붙인다. 더욱 큰 성과있으시기를 빈다.   /  이근배 시인

 

 

2011년 신춘 '무등문예' 시 당선작

 

 

 

외출을 벗다 / 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벋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장요원 시인 (본명 : 장혜원)
순천 출생. 동신대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당선소감]

 
공허한 마음들 포만에 닿길

 
  당선소식이 오던 오후를 눈송이가 촘촘히 메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일 또한 허공을 메우는 일입니다. 각을 세워 허공 한 채를 짓고 또 한 채를 짓고 나면 다시 허공이 들어서지요. 제가 건축하는 詩로 인하야 빽빽한 오늘을 살아가는 공허한 마음들이 포만에 닿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정보다 시를 더 사랑하는 아내를, 엄마를 묵묵히 지켜주는 남편과 아들 딸에게 영광 돌립니다. 늘 힘이 되어준 명린 언니, 정애 언니, 현웅 시인께 감사드리며, 배 아파도 당선됐으면 좋겠다던 친구 황정숙, 서화 시인님, 기홍 시인, 현주 언니, 명희 언니 그리고 시마패, 큐브 님들을 겸연쩍은 마음으로 불러봅니다.
 

  부족한 저를 세워주신 무등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20년 역사의 신춘무등문예는 가히 전국적인 위상을 구가하는 듯 보였다. 풋풋함의 기척들이 채 가시지 않은 십대들의 투고작에서부터 멀리 해외 이민자에 이르기까지 원고들이 걸어온 주소지는 경향각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천 여편에 이르는 투고작들에게서 아직은 기척같은 시의 유용성을 감지하는 일만으로 선자는 잠시 기꺼워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곧 '한 편의 시'를 찾아나서는 고통의 축제는 시작된다.

 
  순간마다의 갸우뚱거림과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6명의 작품이 남았다. 어쩌면 그렇게 줄여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민달팽이'외 4편을 투고한 정순의 작품에서는 타자들에 비해 튼실한 시적 문장의 안정감이 짚혀졌다. 그러나 문제는 5작품 모두가 동어반복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좀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은 시안(詩眼)과 보폭으로 그의 시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었다.

 
  '화장터 가는 길'외 3편을 낸 박다영은 표제시의 수준을 다른 작품들이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막의 오후 세 시는 당신이 가루가 되기 적당한 온도" 등에서 보이는 고투의 언어를 통해 미지의 그의 시의 기미가 짐작됐다.

 
  '거울을 마주한 이상'외 2편의 서경에게서도 지난한 습작기를 거쳐온 노회한 문장들이 읽힌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서도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발자국에 빠지다'외 3편을 낸 유시은의 시는 한편으로 기성에 가까웠다. 여기 '풀밭'인 경연장에서 그의 시는 자연히 불리했다.

 
  '전어'외 3편을 응모한 김정애와 '바람의 고삐'외 2편을 낸 장요원의 작품이 남겨졌다.

 
  김정애의, '전어'가 올려진 아버지의 밥상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양철밥상'이다. "젓가락 끝을 맞추려는지" "탕 탕" 양철북 소리를 낸다는 바라봄만으로, 실상(實想)이 시가 되는 지점을 간파한 듯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시 역시 '그늘'을 거느린 완성된 시력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세 편의 투고작이 고른 수준에 올라 있는 장요원의 시 '외출을 벗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는 '스타킹'의 환치는 비교적 젊고 튼튼하게 읽혔다. 한 편으로 어딘지 수사와 외피에 조율하는 듯 여겨지는 그의 시업의 미래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 '깊이'의 모서리를 체득하는 일에 한동안 복무해야할 것으로 비쳐졌다.

 
  당선자의 장도가 보다 원대하고도 높이 있는 영토에 거뜬히 안착하기를 바란다 

 

심사 : 정윤천(시인)

 

2011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당선소감]
 

"문 밖 지천인 詩의 몸들, 찾아나설 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는 듯, 모월 모일 일요일 오전 열시는 맑고 고요하다.

 
  오랜만에 들른 옛집, 아흔에 접어든 아버지의 숨소리도 깃털처럼 가볍다. 나는 지금 애벌레처럼 잠든 아버지 옆에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필사본 가사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낡고 바랜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바스라질 것 같던 초서체의 글씨들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흘림체 글씨들이 어찌나 단정한지 풀어져 있던 마음들이 다 숙연해진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떤 열정이 내 피돌기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들어 옴을 느낀다.

 
  돌아보니 투고를 끝내고 소홀했다 싶었던 며칠이 후딱 지나갔다. 왜 그런지 다시금 목이 말라온다. 문 밖을 나서면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을 지나면 동네 어귀에 자그만 예배당이 있다.

 
  꿈결일까, 동짓달 카랑한 하늘을 가르고 내 귓가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소리가 댕댕거린다. 어떤 통보를 내가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감출 수 없는 설렘에 문을 나선다. 우듬지마다 목마른 새를 기다리는 몇 알의 사과에 눈물이 핑 돈다. 내 시가 딱 저랬으면 좋겠다. 잎사귀들이 푸르게 태질 하는 시간을 지나 눈먼 새까지 달게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는 그런 나무였으면 싶다.

 
  늘 변함없는 미소로 잔잔한 격려를 보태주신 영남대 이기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청도까지 오르던 먼 길이 오늘에 이르렀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내 망설임에 참 언어의 결을 환하게 열어 보여주신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끓어오르던 시어들을 담금질하던 교수님의 열정이 미흡한 내 시의 깊은 뿌리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늘 따뜻했던 경주대, 영남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나의 남편과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영광과 두려움을 함께 안겨준 영남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표하며 문 밖에 지천인 저 시의 몸들, 감히 찾아 나서라는 뜻 헤아릴 것을 약속한다.


 

 

[심사평]


 "사물과 세계 적절히 통제, 시적긴장 부여"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 : 이하석·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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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김지혜 시인(본명 : 김춘순)
1952년 강원도 춘천 출생. 수원여대 졸업. 경기도 성남시 사회복지단체 기아대책 소속 중동제2복지회관 사회복지사

 

 

[당선소감]
 

짐승 배설물이 내뿜던 난로의 온기가 준 선물

 
  당선통보를 받고 예전 벌판의 집에서 느꼈던 온기가 생각났습니다.
 

  딱딱하게 마른 짐승의 배설물이 내 뿜던 난로의 그 온기.

 
  맨 처음 짐승의 뱃속에서 쏟아졌을 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을 그런 배설이라면 지금 나의 이 지난한 배설도 그와 같은 級(급)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늦은 걸음입니다. 뒤처진 걸음입니다. 그래도 간혹, 뒤를 살피는 업이 천직이 될 수도 있다는 용기를 내어 봅니다. 척후병의 막중함으로 詩作(시작)에 임하겠습니다. 안도의 한 숨이 얼마나 방심하는 순간인지를 다시 한 번 되뇌이면서 잠시만 기뻐하겠습니다.

 
  새벽운동시간까지 깨어있는 나를 보며 잠 채근을 해주던 무뚝뚝한 남편과 가족의 둘레에 앉은 승준, 은경, 동현, 수연, 동준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딸만 낳아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던 어머님의 기쁨도 남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시의 언저리부터 살펴주신 박해람 선생님, 목적지를 욕심내지 말고 잠시 쉴 수 있는 쉼을 욕심내라던 그 말씀 내내 새기겠습니다. 또 함께 구름밭을 경작하는 경운서당 문우들, 그대들이 내뿜는 내공 덕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서로를 보듬고 격려해주는 다울동인, 용인문학회 식구들, 첫걸음을 떼게 해 주신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이라는 축제의 자리에 앉혀주신 정희성, 강영환, 허정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시작의 각오를 올립니다. 국제신문의 선택에도 또한 누가 되지 않는 행동을 다짐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심사평]


삶을 응시하는 깊이와 고단한 삶 밝게보는 능력 탁월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의 심사는 예심 없이 271명이 보낸 전체 응모작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 총 27편이었다. 논의에 논의를 거쳐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벗어놓은 외출' '둥근 강' '폐기물집하장 가는 길' '비밀의 화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등 5편이었다. 이 중에서 '비밀의 화원'과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최종논의가 있었다.


  '비밀의 화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시로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시였다. 이주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솜씨가 뛰어난 시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삶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화자가 관찰자의 태도로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 김지혜가 고르다는 점을 높이 사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본심 심사 : 정희성 강영환(이상 시인) 허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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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김후인 시인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삼육대학교 졸업. 재림문인협회 회원.

 
 

[당선소감]
 

어머니 밥 짓던 밥 불 생각나


  나무의 문이 만들어준 빈 방에 첫 불을 넣으면서 그 옛날 어머니 밥 짓던 밥 불이 생각납니다. 젖은 불 연기에 짓던 눈물. 그 연기는 그리움이겠지요. 제게는 일찍 떠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상실들이 시로 와서, 오래 같이 살다보면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빈자리가 깨워준 서툰 글밭이 자칫 묵정밭이 될 뻔 했지만 이런 지경까지 넓히게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운서당 학우들, 그리고 하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빈방 새로 들이는 각오로 첫 불을 넣고 두려운 불길도 손에 익혀야겠지요. 찬바람이 불지만 제게는 씨앗을 생각하게 하는 봄날입니다.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글 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늘 격려해주신 재림문협 회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등기 심부름을 자주 시켜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방해꾼이면서 따로 글감도 주는 정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시의 씨앗을 틔우고 묻습니다.

 

 

 

[심사평]
 

 치밀한 문맥·팽팽한 거리 믿음직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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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김후인 시인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삼육대학교 졸업. 재림문인협회 회원.

 
 

[당선소감]
 

어머니 밥 짓던 밥 불 생각나


  나무의 문이 만들어준 빈 방에 첫 불을 넣으면서 그 옛날 어머니 밥 짓던 밥 불이 생각납니다. 젖은 불 연기에 짓던 눈물. 그 연기는 그리움이겠지요. 제게는 일찍 떠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상실들이 시로 와서, 오래 같이 살다보면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빈자리가 깨워준 서툰 글밭이 자칫 묵정밭이 될 뻔 했지만 이런 지경까지 넓히게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운서당 학우들, 그리고 하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빈방 새로 들이는 각오로 첫 불을 넣고 두려운 불길도 손에 익혀야겠지요. 찬바람이 불지만 제게는 씨앗을 생각하게 하는 봄날입니다.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글 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늘 격려해주신 재림문협 회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등기 심부름을 자주 시켜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방해꾼이면서 따로 글감도 주는 정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시의 씨앗을 틔우고 묻습니다.

 

 

 

[심사평]
 

 치밀한 문맥·팽팽한 거리 믿음직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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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770호 소녀 / 우광훈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우광훈 시인
1969년 대구출생. 대구교대 졸업.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등단. 제2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소설)

 

 

[당선소감]
 

  저는 분명히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요. 앨리스는 왜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일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3년 전, 한 무명 소설가는 소설이란 것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쉽게 말해 코커스 경주에서 그 흔한 골무조차 받지 못했던 거죠. 이후, 그는 하루 종일 깜깜한 토끼굴 속을 헤매며 책만 읽었습니다. 재미있고 기이한 이야기만이 시간을 세워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가는 문득 시(詩)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시가 나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오래된 동경과 해묵은 오해 때문이었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오로지 시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조언과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곧장 하트여왕이 있는 성으로 3편의 원고를 보냈습니다. 이후, 그는 우체국에 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이 시의 목을 베어라! 저 시의 목을 베어라!” 3주일 뒤,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물고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울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처구니없음에 한동안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그날 밤, 그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좀처럼 잠들지 못했습니다. 툭 튀어나온 자신의 이가 한없이 부끄러웠으니까요. 존경하는 장토끼 형의 충고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드디어 파멸해버린 것일까요? 그렇게 뒤척이다, 스르르 잠들어버렸습니다. 입가엔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소설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은 온통 지루한 일상과 무관심으로 바뀌어있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험프티 덤프티를 만나려면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하는 거죠? 시냇물인가요? 아니면 양의 가게인가요?

 

 

 

[심사평]
 

  언어의 구체성과 상상력의 탁월함
 

  마지막까지 남은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외 3편,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 외 2편,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 외 2편, 우광훈의 ‘1770호 소녀’ 외 2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이었다. 네 사람 모두 언어의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만만치 않은 수준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은 긴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다양한 감각으로 그려낸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 한 작품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다른 작품이 너무 처져 있었다.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구체성이 시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말티즈가 죽어도 그 딸랑거림을 그리워할 것이다.”라든가, “아내는 土耳犬으로 남고 싶어 하는/저 바다 빛 그늘 진 눈동자를 보았을 것이다.”와 같은 이미지들을 높게 보았다. ‘당선작’으로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역시 ‘외 2편’이 ‘말티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 무리한 설정과 그에 따른 언어의 ‘과부하’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은 재기발랄한 말솜씨와 상상력, 거침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억지가 없는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붕에 걸린 구름의 뼈를 다 발라”내고, “샛강의 입이 건너편 뚝방까지 죽 찢어져”가는 이 작품 또한 충분히 당선의 영예를 안겨줄 만 했으나, 어쩌랴, 이 응모자에게도 작품 간의 심한 편차가 걸림돌이 되었다. 작품 공모에 여러 편을 응모할 경우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하면 뽑는 이에게 불안감을 주게 마련이다.

 
  네 사람의 시 가운데, 우광훈의 ‘1770호 소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함께 보내온 나머지 두 작품도 똑같이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선작에서 보듯이 이 작품은 스케일이 참 크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깊은 사유를 거느린 채, 그것도 아주 느리게, 우주와 역사, 문명세계를 거닐며 현실과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은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닦아 쓰는 말의 절차탁마가 보였고, 행간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신뢰가 가는 시인이다.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걷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 : 도광의(시인)· 문인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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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홍문숙 시인
1958년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성장. 2009년 계간 ‘차령문학’ 등단, 동 문예지 편집위원. ‘석수 서예’, 평택도서관 등에서 한문학 강사로 활동
.

 

 

[당선소감]


  은유의 텃밭에서 세월과 만나다.


  아버지는 인문학자시다. 그분이 읽던 흑백의 서책들은 이제 나비 한 마리 꿈꿀 수 없지만 아버님은 가끔씩 내 삶의 철자법이 맞지 않을 때에도 설핏 숨어들기에 좋은 내 인문학의 서책이셨으며 따뜻한 은신처였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내 문학의 시원은 아버지로부터의 어쩔 수 없는 유산일 것이며 유산이란 때로 세월의 미시성을 강의 깊이로 흐르다가 문득 마주치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 그리고 나에겐 내 필생의 힘으로도 낳을 수 없는 어머니라는 의미와 인연의 텃밭, 그 대신 신생의 어머니를 만나는 세월의 대가가 곧 나비였으리라.


  권태가 욱신거릴 때마다 텃밭을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한 사나이는 내 권태의 목록과는 관계없는 도시 저쪽의 서류철을 뒤적이거나 어느 소인국의 작은 병정처럼 돌아오곤 했다.


  나비가 우화를 꿈꾸는 건 오후의 우울을 낳기 위함이지, 젖은 소낙비가 파줄기의 어느쯤을 똑똑 부러뜨리기도 하는 그 놀랍고 목이 긴 은유 속을 낮은 금속질의 열쇠로 딸깍, 열어주던 한 아이 그 속에서 올겨울엔 아들 정환이와 오월이 되어 은신시킬 새로운 파씨들을 골라보는 일…


  내 문학의 항해가 검은 돛배일 때마다 은밀한 등대가 되어주신 박경원 선생님과 ‘차령문학’ 그리고 시내에서 십분 거리의 내 귀가길을 동행해준 몇십년 동안의 평택 방축리행 시내버스에게도 겸손한 감사를 전합니다.


  또한 저에게 큰 기회를 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감사드리며 더 깊은 문학의 길로 정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경직돼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 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 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현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심사 : 신경림(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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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 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강은진 시인
1973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수료.

 

 

[당선소감] 


  포장하지 않고 사람 마음 움직이는 詩 쓰고싶어  
  
  잠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연명치료를 받던 생면부지의 노파가 갑자기 사력을 다해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백년의 말들이 출렁였고 미인(美人)의 청춘이 푸르스름한 눈썹에 가지런히 염되어 있었습니다. 편한 호흡으로 써내려갔던 시인데 뜻밖에 당선의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분이 어디선가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다 내려 놓으려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깊은 고통의 밤 가운데 짧은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늘 네 작품이 최고라고 격려해 주셨고, 환한 웃음으로 수상 소식을 알려주시곤 했던 첫 국어선생님. 그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다시 시를 붙잡도록 만들었습니다. 고(故) 최학규 선생님께 너무 늦은 감사를 바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멋진 시가 탐나서 화려한 수사로 공허함을 포장하고 라캉이나 로트만 같은 이름을 기웃거리기도 했었지만, 결국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시의 진심임을 깨달아 가는 중입니다. 부족함 속 진심의 힘을 믿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증명되지 않은 저에게 시의 길을 열어주신 최동호 선생님. 빚진 마음, 배신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으로 조금씩 갚아가겠습니다. 따뜻했거나 혹은 혹독했던 학형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에게는 영원히 시인이신 아버지, 우리 엄마, 사랑합니다. 호연·대연, 긍정의 힘을 믿길. 나의 모든 것인 채원에게 남길 것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호일, 최후의 독자일 당신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사평]


  삶의 건강한 구체 다뤄… 한국 시단 큰 재목되길

 
   예년에 비해 투고된 작품량은 늘었으나 수준은 비슷했다. 윤지문의 '새와 흙', 강은진의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석상준의 '뚜껑', 김후인의 '결치(缺齒)' 등 네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뚜껑'은 '그냥 썩게 놔두는 것보단 나중에 상하더라도 누군가 퍼먹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에'에서 알 수 있듯이 산문성이 지나치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 '결치(缺齒)' 또한 빈 집이 늘어나는 시골 풍경을 결치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조금 낡은 감이 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남은 두 편 중에서 '새와 흙'은 기성시인의 시를 인용한 점이(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인으로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또 다른 투고작 '새와 구름'에서 구체성이 부족하고 한껏 멋을 부린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재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심사 : 황동규(시인)·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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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 조세희 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정창준 시인
36세.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

 

 

[당선 소감]

 

  “철거민 들여다보면서 詩 표현 떠올려”
 

  “시를 다시 쓰면서 딱 3년만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가 바로 3년째가 되는 해네요.”
시 부문 당선자 정창준씨(36·사진)는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시를 썼지만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취직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와 멀어졌다. 내년이면 교사 경력 10년째인 정씨가 그 꿈을 다시 꺼내들게 된 것은 3년 전 “대학시절 썼던 시들이 좋던데”라는 말을 대학원 교수로부터 전해들으면서다. 대학시절 썼던 시들은 컴퓨터 메모리가 삭제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우연치 않게 남아있던 유일한 프린트본을 후배로부터 돌려받으면서 정씨는 다시 시를 쓰게 됐다. 그리고 3년째, 마침내 ‘오래된 꿈’이 이뤄졌다.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정씨는 <난쏘공>의 화법을 인용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혔다.

 
  “용산참사는 결코 있어선 안 되는 너무 끔찍한 일인데도, 사람들에게 쉽게 회자되기만 할 뿐, 절실한 이야기들은 외려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난쏘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고 학생들에게도 꼭 가르치는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1970년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음아파서 그것을 모티프로 시를 쓰게 됐습니다.”
  정씨는 자칫 상투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체화된 언어로 피부에 와닿게 표현했다는 호평을 심사위원들에게 받았다. 정씨는 “울산은 급격한 팽창 과정을 거치면서 용산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가진도시”라며 “재개발이 예정된 학교 옆 철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표현들이 나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선작 이외의 다른 시에서도 사회문제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정씨의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정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대형마트, 베스트셀러나 실용서로 채워지는 서점의 풍경을 시로 써내려갔다. 그는 “사람에서 비롯되고 사람다움을 지키는 게 문학의 가장 큰 소임인 것 같다”며 “사회적 약자들이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신춘문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며 “아직 시 세계나 세계관이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싶다”고 새내기 시인의 포부를 밝혔다.

 


 

[심사평]


  “실종된 현실인식의 발견… 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 외 4편),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 외 4편), 김영진(‘도끼발’ 외 4편), 류성훈(‘밤의 도플러’ 외 4편),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 외 4편)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심사 : 이시영(시인), 황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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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박송이 시인
30세. 전북 순창군 동계면. 한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과정 수료.

 

 

[당선소감]

 

  나는 작년 이맘 때 대학 노트에 이렇게 쓴 적 있다. '숲은 만져 본 적 없는 울음의 낯선 천국이다. 숲은 헐벗은 동공이다.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지나치는 언젠가 살아본 그만그만한 표정이다.' 나는 자주 숲길에 들어섰고 숲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곤 했다. 숲은 늘 낯설고 평온했다.


  종종 숲에서 길을 잃었고 숲길을 한참 걷다보면 어느새 어둠이었다. 숲 어딘가에 퍼질러 한나절 먹먹하게 울고 싶다가도 간혹 숨이 턱턱 막혀왔기에 느리고 길게 호흡해야만 했다. 내가 한 때 메마른 심장으로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노트에 나를 적는 밤이 짧아지기를 바란다. 나 아닌 다른 여행자의 숲길에서 나 아닌 무수한 여행자들에게 말 걸 수 있는 밤이 오래 찾아 들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여태 사랑해 왔던 모든 사랑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사랑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서로의 여행과 마주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숲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내가 무심결에 지나쳤을 숲길 사이로 한 무더기의 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내 사랑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싶다. 나는 빛의 표정으로 또 다시 살고 싶어진다.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신익호 지도교수님과 여러 교수님들께, 문예창작학과 김완하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멀찌감치 어떤 절실한 힘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애인에게 감사드린다.


 

 

[심사평]


  새의 존재에 대한 통찰 돋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에 낙점
 

   예심 없이 모든 투고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숙독과 합평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시국 탓인지 꽤 많은 작품에서 유행처럼 죽음을 서슴없이 다루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또한 빈번한 외래어의 사용과 심지어 영어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는 것은 21세기 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가진 작품에 기대를 걸며 '가족의 탄생'(팽샛별), '감독의자'(지석현), '새는 없다'(박송이)를 최종심에 올렸다. '가족의 탄생'은 영화를 보듯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 시를 들어오게 하는 힘이 좋았다. 하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산문성이 문제였다. 그런 산문성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맛을 잃게 해 아쉬웠다. 앞으로 가벼워지는 것에 대해 노력해주길 부탁한다.


   '감독의자'는 신선한 소재의 참신한 작품이었다. 산문시였으나 시의 흐름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투고한 다른 작품이 그와 같은 무게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국어로 쓰는 시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새는 없다'는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긴 길이의 시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감에 좋은 점수를 얻었다. 투고자들이 흔히 가진 애매모호함을 극복하는 선명성도 좋았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기에는 힘의 결락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새는 없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 대성을 바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들에게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 : 신경림(시인) 정호승(시인) 정일근(시인ㆍ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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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권민경 시인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네 사람의 것이었다. 임춘자 씨의 ‘주유소의 형식’ 등 6편은 안정된 표현력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연우 씨의 ‘그늘의 위대한 고집’ 등 6편은 언어에 대한 수사적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주었다. 류성훈 씨의 ‘저녁의 진화’ 등 5편은 어법의 상대적인 참신함이 인정되었다. 권민경 씨의 ‘대출된 책들의 세계’ 등 5편은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적었던 임춘자 씨와 권민경 씨의 시들이었다. 임춘자 씨의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심사 : 이시영(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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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유빙(流氷) /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당선 소감]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저를 독려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지 않을 때,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을 때, ‘소통’은 거짓과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조금씩 버리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만큼 타인의 구원도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대한 거절’을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이에서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더디게 쓰더라도 그만두지는 않겠다. 시 한 편과 한 편 사이에 열 길 낭떠러지가 있음을 잊지 않겠다.


  한 줌의 시를 건져 올려 주신 문정희,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저를 독려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선후배님, 동학들께 감사드립니다. 화요팀 선생님과 문우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계신 스승들과 가까이 있는 지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시의 시작이자 끝인 할머니, 오래 사세요. 은영아, 사랑해.

 


 

[심사평]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눈 돋보여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을 찾긴 힘들었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임여기의 ‘면접관’, 정승기의 ‘실종’, 이재흔의 ‘스파이더맨의 후예’, 이도은의 ‘아주 식물적인 꿈’, 신철규의 ‘유빙’ 등 5편이었다. ‘면접관’은 면접관과 면접인 간의 관계 대립을 긴장되고 설득력 있게 고조시켜나갔으나 결구 부분이 너무 안이했다. ‘스파이더맨의 후예’는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나타냈으나 ‘제각기 다른 일상의 벼랑 끝에서 한 번씩은 실족했던 사연들이’ 같은 표현이 산문적이고 진부했다. ‘실종’ 또한 현대인의 실종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산문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아주 식물적인 꿈’은 식물적인 꿈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체적 양상이 불명확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 결국 당선작은 ‘유빙’으로 결정되었다. ‘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한국시단의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

 
심사 : 문정희·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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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정영희 시인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심사평]


자기 성찰에 충실한 일깨움 돋보여

 
  올해의 응모작품(426편) 대부분이 그 어느 해보다 현란하고 무분별한 어휘들이 난무하는 작품들이 많고 자기 목소리를 가진 작품이 적었다. 공허와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으로는 정영희의 ‘끈’,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 등의 작품이었다.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은 나방과 조각상이 대화를 통해 발가벗겨진 부동의 몸인 조각상과 나비 아닌 존재로써의 날 수 있는 생명체로의 회복을 꾀하고 있는 발상이 흥미롭다.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란 작품에서 ‘세상사가 그대가 피고 지는 사이에 먹어치운 빵과 우유 같다’는 표현 등이 이채롭다. 그리고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란 작품은 있는 힘 다해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젊음을 불사르고 태연히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의연함에서 한 생명의 존엄함을 읽을 수 있었다.


  정영희의 시 ‘끈’에서는 이 시대 삶은 얻는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잃거나 잊혀가는 것들이 많다. 뿌리근원에 대한 의식을 통해 자아의 성찰과 인식을 찾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대로 풀어 놓으면 한편의 동화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정통적 서정의 힘, 자아발견의 성찰이란 일깨움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밀었다.


 앞으로 역동적이고 절제된 시어 찾기와, 더욱더 관념을 탈피하고 사물시를 쓰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 : 정연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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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죽부인(竹夫人) / 김후자

 

                                 
재활용 쓰레기 더미 위에
죽부인이 누워계신다
다른 건 다 가져가도 사람들
죽부인에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상처가 상처를 달래줬을 시간들이
구멍 뚫린 살 속으로 파고든다
조강지처 어머니도 버려진 적이 있었다
틈만 나면 밖으로 도는 아버지
휘파람 따라 둥둥 떠다닐 때
대숲에 휘청이는 바람소리만 안고
뒤척이던 어머니는
얇은 잠속에서도 늘 깨어있었다
아무것도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노을처럼 느적느적 돌아오신 아버지
버려진 아버지를 품에 안은 건
죽부인 당신이었다
곧은 성품,
흐트러짐 없는 당신이 누워계신다
움푹 패인 상처마다
괜찮다, 괜찮다 나지막한 소리
달꽃이 피었다

 

 

[당선소감]

 
시의 문고리를 잡고
제 글 중심에는 늘 어머니가…


  '시가 뭔지 아느냐'라는 질문엔 아직도 쭈빗쭈빗 말문을 잇지 못합니다. 이제 막 시의 문고리를 잡은 정도랄까요?


 시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모호하고 불확실한 그 무엇에 나는 오늘도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아직 멀고도 먼 길이지만 제가 가는 이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 제가 빚어낸 시들이 그분들의 가슴에 위안이 되길 바래봅니다.


 시가 뭔지 문학이 뭔지 잘 모르시는 어머니, 그래도 당선 소식을 알리자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저의 글 중심에 늘 당신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시를 알게 해주신 제 주위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일처럼 기뻐해준 선자와 언니, 오빠. 나를 안고 빙그르르 돌며 엄지손을 치켜든 딸들,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와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꼭 좋은 시인이 되길 바라던 나의 동생. 수정, 정화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다 못해 울음을 삼켜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있겠지요. 너무나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저에게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 상은 더욱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받겠습니다.

 

 

김후자 시인
1967년 경북 출생. 제25회 마로니에 전국 여성백일장 장려상 수상. 2006년 동서커피문학상 은상 수상. 2008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
 
 

 

[심사평]
 

'죽부인' 통한 삶의 통찰력 돋보여
 군더더기 없는 표현·선명한 주제의식 높이 평가

 
  예년에 비해 수준 높은 응모작들이 많았다. 지나치게 멋 부리거나 애매모호한 작품은 줄어든 반면, 서정성 짙은 시들이 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했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서 우경주씨의 '시계들의 소풍', 이경옥씨의 '해바라기', 김후자씨의 '죽부인' 등 세 편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우경주씨의 <시계들의 소풍>은 달리의 미술작품을 시적 소재로 삼아 인생에 은유한 점이 신선했다. 그러나 시계라는 소재에만 너무 국한한 나머지, 표현이 작위적이고 결구 부분이 안이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이경옥씨의 <해바라기>는 소재를 파고드는 집요함과 표현력은 높이 살만했으나, 시어의 명징성이 부족해 읽는 맛을 떨어뜨려 아쉬움을 남겼다.
 

 심사위원들은 김후자씨의 <죽부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시적 표현과 비유에 노련함이 엿보였고, 선명하게 주제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쓰레기더미 위에 버려진 죽부인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어머니의 삶에 투영하는 방식이 억지스럽지 않고 능수능란했다. '움푹 패인 상처마다/괜찮다 괜찮다 나지막한 소리/달꽃이 피었다'와 같은 끝맺음도 시적 완성도를 높였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심사 : 김종철, 신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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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은단풍 / 김남이

 
 

사원식당 앞 은단풍나무,
어린아이 징검다리 건너듯 갸웃갸웃
자그마한 풍선이 포르르 날며 구르는 듯
조심스레 입 밖으로 걸어 나오는
그 소리 은은하고 맑아서
나중에 ‘은단풍’이라는 딸을 낳고 싶었던
 

그 나무 밑에서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비스킷을 먹었지
기계 소리도 작업반장도 없는 그 나무 밑에서 깔깔거리며
스무 살 부근을 와작와작 부셔 먹었지만
몇몇은 그 나무에 기대어 늙은이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사원식당 앞 은단풍
깨끗한 아침 햇살과
강해지려고 자꾸 다짐하는 한낮의 태양과
한쪽 뺨이 그늘진 노을도 골고루 먹고
큰 키로 수천의 반짝이는 잎들 흔들 때
내가 믿는 신처럼 올려다보게 하던
 

은단풍 은단풍 은단풍
그렇게 주문을 외면

 
내 안에서도 나무 한 그루 뚫고 나와 삐죽 솟던
그 나무에 무엇인가 자꾸 매달고 싶던…….

 


김남이 시인
1969년 경북 상주 출생. 대구 달서구 도원동


 

[당선소감]


시를 따로 둔 내 삶 생각할 수 없어
   

  응모 작품을 부치고 우체국을 나올 때 몸도 마음도 텅 빈 듯했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달콤한 빵을 샀다. 까칠한 혀로 빵을 우물거리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내게 타일렀다. 그런데, 내 이름을 확인한 목소리가 당선 소식을 전했다. 나를 달래야 할 때 시를 찾았다. 때로 시가 평온한 나를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 위로 받고 싶을 뿐 시에게 잡히고 싶지 않아 찾아오는 시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랬음에도 시와 나는 서로를 탐닉했다. 이젠 정말 시를 따로 두고 내 삶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엄마, 아버지, 저세상에서도 응원하고 기뻐하시겠지요. 묵묵히 바라봐 준 남편과 비싼 운동화 신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미안했는데, 내 애쓴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어 기쁘고 고맙다. 시의 길로 안내해 준 해양 선배, 길의 초입에서 시 맛을 알게 해 준 서정윤·박윤배 선생님, 늘 채찍과 당근인 친구 기임이도 생각난다.

 
  푸른방송 문화센터와 정화섭 시인을 비롯한 ‘시 만나러 가는 사람들’ 문우들과 언어를 타고 즐기며 한굽이 넘어가고 깊어지는 문학의 묘미를 일깨워 주신 문무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쩌면 쓰레기를 위한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소침해지기도 하던 최근의 날들에 당당할 수 있게 큰 힘 주신 심사위원님께 열심히 쓰겠다고 약속드린다.

 

 


[심사평]


해맑은 느낌 자신의 체험과 잘 배합 
   
  22명의 작품이 본심을 통과했다. 우리는 응모자의 이름을 가린 원고를 읽었다. 지난해에 비해 좋은 시들이 훨씬 많아 시를 읽는 일이 즐거웠다.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는 뜻이리라. 향상된 작품의 수준도 우리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탄탄한 시가 여럿이었다.

 
  당선작 〈은단풍〉은 ‘은단풍’이라는 음성이 내장하고 있는 은은하고 맑은 느낌을 자신의 체험과 잘 배합하여 성공한 작품이다. 시인의 해맑은 세계관이 활달한 어조에 실려 더욱 매력적이다. 정작 알맹이로서의 삶은 들어내고 언어만 난무하는 시가 유행하는 때에 좋은 귀감이 되리라고 본다. 축하를 드린다.
 

  이밖에 우리의 주목을 끈 시로 〈하모니카 소리〉가 있었다. 당선작과 마찬가지로 발랄한 문체가 시에 생기를 더했다. 감각을 절제된 언어로 껴안을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를 ‘만드는’ 기술이 진정성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면 안된다.
 

  또 하나 〈징검다리〉는 삶에 대한 깨달음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다. 하지만 시적 깨달음은 남이 건너가지 못한 강을 건너가려는 고집에서 나온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나무의 문〉〈끈〉〈붉은발농게〉〈마늘〉도 유심히 읽었음을 적어 둔다.

 
  시라는 양식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 그것도 재능이라는 것을 당선자와 모든 응모자에게 말해 주고 싶다.


심사 : 이문재,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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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어떤 소믈리에 / 강혜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회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 소믈리에 : 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강혜원 시인
1972년 광양 출생. 조선대 국문과 졸업. 논술학원 강사.

 

 

[당선소감] 

 
   큰딸의 발걸음 응원해주세요


   큰딸 구두 680원, 콩나물 50원, 두부 30원……, 30년을 살아낸 늙은 한옥을 떠나오면서 어머니는 책장 서랍 속 몇 권의 가계부와 일기장, 빛바랜 편지 뭉치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당신 속에 일렁이던 뜻 모를 불꽃을 십 원 한 끝 틀림없는 셈법과 쓸쓸한 몇 줄의 일기로 다독였을 어머니.

 
   사라져 버린 그 뭉치 속에는, 성긴 눈송이 같은 밥을 먹고 도무지 펴질 것 같지 않던 가계도를 주머니에 구기고 다니던 청년의 아버지가 삼동의 골목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말한 사랑의 고백도 함께 있었다.

 
   귀한 말씀처럼 간직하며 이따금 꺼내 보고 싶었던 그것들을 조용히 태우시던 어머니의 남모를 회한이 오래도록 마음을 에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꺼지지 않고 그날 이후로 뜨겁게 울고 있다. 때로는 그을음을 피워 올렸고 때로는 꺼질 듯 위태로웠지만 ‘시’의 얼굴로 나를 찾아와 넘실거린다.

 
   겨울은 여전히 깊고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 강물 위로 튼튼한 다리를 놓을 재간이 내게는 없다. 이렇게 더듬거리며, 왜 그렇게 멀고 야속하냐고 악을 쓰며 걸을 것이다. 길이 아득해지는 날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어머니가 내 핏줄 속에 흘려보내주신 눈물 어린 화법으로 곱은 손마디를 녹여 세상에다 대고 오래도록 연애편지를 쓸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세요. 서툴겠지만 행복할 큰딸의 발걸음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세요. 떨고 있는 어깨를 두드려 일으켜주신 심사위원님과 광주일보사에 감사드린다. ‘푸른 시의 방’ 강인한 선생님, ‘시인회의’와 강정숙 선생님, 정윤천 선생님, 고성만, 조성국, 김행란 선생님, 김재준 선배, ‘터앝문학동인회’와 매서운 나의 독자 은주에게 감사드린다.

 

 

 

[심사평]

 
   본심에 열여덟 명의 시가 올라왔다. 10대에서 60대까지 각 연령층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지방도시에서 시골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자기의 방에서, 시에 골똘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뭉클했다. 본심에 오른 만큼 언뜻 보기에 다 근사했다. 그 중, 시상(詩想)은 기발하지만 아직 밑그림 단계인 시,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시, 말을 대폭 줄여야 할 중언부언 시들을 추려냈다.


   이효정, 오정순, 권명호, 강혜원 이 네 명의 시편들이 남았다.
   이효정의 ‘손잡이의 시간’은 신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은하수를 횡단하는 한 무리의 맘모스를 만나면’이나 ‘그리고 오래된 인류의 분실물을/하나 둘 태우고 싶어’ 같은 맥락에 있어서 뜬금없고 표현에 있어서 상투적인 구절이 걸렸다. ‘고서(古書)’는 완성도가 높았다. 판타지가 겉돌지 않고 현실에 고즈넉이 배어들어 있다. 판타지가 주조인 시는 체험이 받쳐줄 때 설득력이 생긴다.


   오정순의 시편들은 풍경으로 정서를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매끄럽게 잘 읽힌다. 그런데 좀 늘어진다. 말을 압축하면 탄력이 붙을 것이다. 권명호의 ‘남일상회’는 시골서민의 풍취가 잔잔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서정시다. 당선작과 끝까지 겨눠보다가 아쉽지만 놓았다.

 
   강혜원의 ‘어떤 소믈리에’는 소재도 독특하고 표현도 기발하다. 화자인 소믈리에의 삶과 와인의 삶을 포개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올린다.

 
심사 : 이성부 · 황인숙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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