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10 동아일보

문근영 2015. 4. 22. 08:18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유병록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대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것이다

 

 

[당선소감]

 

꽉 쥔 주먹처럼 의지 견고하게 할 것

 

나는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커다란 손도 있다 한 번 휘두르면 길이 나고 바다에 띄우면 그대로 배가 되는 손, 그 계곡에서는 물줄기가 흐르는데, 역사라고 불린다는데

이 조그만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은 연약한 도구에 불과하다 오므려보지만 물 컵으로 삼기에도 작다 흘러 다니는 운명이라고는 고작해야 목을 축이기에도 부족한데

 

겨울 산에 오르자, 폭포가 꽝꽝 얼어붙어 있다 길게 펼쳤던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쥔 폭포, 울퉁불퉁 힘줄이 솟은 물의 팔뚝, 안쪽으로 흐르는 뜨거운 혈관

즐거운 한때를 어루만졌던 손을 씻고 주먹을 쥔다 더 이상 운명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지를 움켜쥐었을 때의 주먹은 견고하다 이제 일격으로 몽상의 호숫가에서 물 마시는 저 물소들을 때려눕힐 시간이다


꽉 쥔 주먹을 가끔 펼친다면 가족과 친구들의 손을 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제자를 격려해주신 여러 선생님과 결점 많은 작품을 위해 기꺼이 통곡의 벽이 되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유병록 씨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생물의 마지막 순간 끈질기게 천착

 

예심에서 골라준 시 작품들 가운데서 다섯 분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거론했다. 성동혁의 ‘렌터카를 타고’ 외 4편은 장식적이거나 매끄럽지 않은 조립이 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유희로 전환하는 유머가 돋보였다. 안웅선의 ‘미션스쿨의 하루’ 외 4편은 간혹 서사를 기록할 때 어색한 문장들이 들어있는 시편이 있었지만 미성숙한 사춘기 화자를 내세워 오히려 내면적 고투의 나날이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방법이 눈길을 끌었다.

 

강윤미의 ‘소심한 소녀의 소보루 굽기’외 4편은 암시성이 확장하는 폭은 좁았지만 지루한 일상에 발랄한 리듬과 어조의 고명을 얹어 아기자기한 서술이 되게 하는 상쾌함이 장점이었다. 박은지의 ‘서랍의 눈’ 외 4편은 시에 산문적이고 설명적인 언술들이 섞여 들었지만 한 가지 사물이나 현상을 끈질기게 해석해 보려는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가 눈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유병록의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외 4편 모두가 절명의 순간에 바쳐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생물의 마지막 그 한순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간혹 상투적 해석이 불필요하게 첨가되었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단연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작품들 간의 질적 수준의 균질함,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 등이 탁월했다.


최동호 시인·김혜순 시인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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