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제5회 한국 시 문학상 수상작

문근영 2015. 4. 16. 14:22
제5회 한국 시 문학상 수상작


낮술 한잔을 권하다 외 9편


박상천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뜨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주춤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 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 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그리움의 모근


아침이면 면도를 하며
밤새 시달렸던 그리움을
함께 깎는다.

뜨거운 물에 촉촉히 젖어
부드러워진 턱수염을
세 번씩 확인하며 지나가는
3중 면도날.
그래도 거울 속 얼굴이 못 미더워
다시 손으로 더듬어 확인해보면
아직 남아 있는 꺼칠한 그리움.

손으로 더듬어
몇 차례 더 확인하고
이젠 됐어.
수돗물을 크게 틀어,
깎아낸 자잘한 그리움의 알맹이들을
하수구로 떠내려보낸다.

잘 가, (가지 마)
꾸루루룩
잘 가, (떠나지 마)
꾸루룩 쭈우욱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리는 그리움.

이젠 됐어.
다시는 오지 마.
세면대에 혹시 남아 있을 수도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리움의 흔적까지
깨끗하게 씻어내곤
안심하고 또 하루를 지나보지만
오후쯤이면
다시 꺼칠하게 돋아나는
이 끈질긴 그리움,
끝내 뽑아버리지 못한
그리움의 모근.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라디오에서 처음 듣는 노래가 나온다.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었지.
신문을 사려 돌아섰을 때 너의 모습을 보았지.

깜짝 놀라 볼륨을 높인다.

발 디딜 틈 없는 그 곳에서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넌 놀란 모습으로 음~~

그러다간 갑자기 노래는
남의 발을 밟는 이야기로 돌아서고
왜 이래? 하는 순간
둘은 만난다.

살아가는 얘기 변한 이야기 지루했던 날씨 이야기
밀려오는 추억으로 우린 쉽게 지쳐 갔지.

그래, 지난 추억은 호흡을 곤란하게 하지.
갑자기 가슴이 턱 막히는데 이미 차는 터널을 들어선다.
이 터널에서는 방송이 끊기는데…
길가에 차를 세울 걸.
지금쯤 헤어질 때 못다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텐데…
왜 그때 그랬느냐고
이제는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텐데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오늘 따라 터널 안에서 차들은 서행이다.
늘 그렇다.
우리의 사랑은 늘 그렇게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예고없이 끊겨버린다.

차가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시 노래가 이어진다.
이미 그 부분은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진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너의 모습이 사라질 때
오래 전 그날처럼 내 마음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엔
빛나는 열매를 보여준다 했지
우리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그날의 노래는 우리 귀에 아직 아련한데

라디오 스위치를 내려버린다.
520910-15734XX


주민등록 뒷자리 번호가
나보다 하나 빠른 그의
한 생애를 정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주민등록 말소 신청서 한 장과
사망진단서 한 장,
두 장의 서류를 내밀자
몇 분 후 동사무소 직원은
그의 생애를 정리한 말소등본을 떼주었다.
등본에는 그가 이사 다녔던 기록들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의 삶 속에 얽혀 있었던
눈물과 웃음, 아픔과 기쁨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더구나 내가 그토록 따라하고 싶어했던
그의 어린 시절의
용감함이라거나 엉뚱함이라거나
그런 것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작스런 그의 실종,
서류 위에서 그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사망으로 주민등록 말소’
열 글자로 그의 한 생애가 그렇게 정리되었다.
치과에서


치과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창 너머 풍경,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전선들이 어디론가로 이어지고 있다.

의자를 눕혀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늘 잇몸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
하루 세 번, 식사 후 삼 분 이내, 삼 분 동안
3, 3, 3을 강조하며
양치질을 하시던 오, 정갈하신 나의 아버지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잇몸 때문에 이빨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기 전부터 나는 그러리라 알고 있었다.
이빨을 건드리자,
몇 만 볼트 전류가 흐르는 전선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일듯
이빨에서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며,
내 몸 깊숙한 곳까지 다다른다.
내 몸에 이렇게 깊숙한 곳이 있었다니…

일어나서 양치질하세요.
양치질을 끝내고
흐릿한 눈으로 내다본
창 밖에는 전선들이 어디론가
또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치과를 다니는 얼마 동안은
아버지가 더 보고 싶겠지.



유리문 앞에서


커다란 유리문을 향해 걸어간다.

유리문 안에 희미하게 비치는 것들,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어른거린다.
밖엣 것이 비치는 것인지
안엣 것이 들여다보이는 것인지
그것조차 분명치 않은 모호한 세계.

내가 걸어들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뒤에 서 있는 나무 같기도 하고
누군가 마구마구 깃발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새들이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뒤에 뻗어 있는 길 같기도 하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 같기도 하고
머리 위 하늘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꿈 속에서 본 듯한
지독한 어둠이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한
경계조차 지워진 세계.

모든 것들을 모호하게 뒤섞어 버리고
태연하게 서 있는 유리문 앞에서
나는 이곳과 저곳,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생각한다.
철문처럼 정직하지 못한,
뻔뻔스러운 유리문 앞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망설인다.



누구나 외롭다


이제는 아내의 손을 대신해서
벽 모서리가 등을 긁어 준다는
어느 노인의,
쓸쓸한 노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손이 닿지 않는 곳의 외로움을 생각했다.

모두들 벽 모서리에 등을 부비며
손이 닿지 않는 곳을 혼자 긁고 있는
우리들의 이 외로움.



추억이 위험하다


내장 공사가 덜 끝난 신축 건물,

‘유리 조심’

‘상가 분양 및 임대 문의
011-97XX-XXXX’

붉은 글씨의 종이 딱지가 붙어 있는
유리창 안 시멘트 바닥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추억들이
그렇게 버려져 있다.
조심할 것은 유리가 아니라
버려진 추억들이다.

버려진 추억들은 유리보다 훨씬 위험하다.
먼지 섞인 톱밥과
페인트 통 하나,
잠시 임대한 공간 속에 놓인
버리진 것들이 임대한 시간의 적요,
그것들이 위험하다.

갑자기 전화가 걸고 싶어진다.

계단의 끝


이 계단을 돌고 돌아 내려가면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으므로
계단 앞에 서면,
내려가 당도할
그곳이 어디인지 늘 궁금해진다.
늘상 오르내리는 계단이지만
나는 늘 계단의 끝이 궁금하다.

아침에 올라왔던 그곳이 아니길 빌며,
생각지 못했던 그곳에 당도하길 빌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지만
내가 당도한 곳은 언제나 그곳이다.

계단의 끝,
나는 늘 그 배반을 꿈꾼다.




버려지는 것들에 관하여


내 삶의 어느 구석엔가 함께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버려지는 사물들,

고운 빛깔의 포장지
고급스러운 포장끈
예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상자
이제는 고장나버린 손목시계
펜촉이 망가져버린 만년필
해가 지난 포켓용 수첩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채워진 연하장

그들을 버리기 위해선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해요.
쓰레기통에 재빨리 버린 후
일부러 외면해보지만
자꾸 눈길이 가고
마음이 쏠리는 건 어찌할 수 없어요.
그들도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우리의 감정 정리가 그리 쉽진 않네요.

오늘 아침에는
그들을 실은 쓰레기차가
어디론가 떠나고 있습니다.
쓰레기차에 실려 떠나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내 감정의 멍울들.

어디로 가나
쓰레기차 뒤를 한번 따라 가볼까요?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메모 :